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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벽 등반. 에 해당되는 글 5
2008.10.07   하얀 빙벽 위에 울던 표범 송준호. 2
2008.03.03   동계 등반 기술 1
2007.01.14   겨울철 빙벽 등반. 
2006.09.13   동계 등반 장비 1
  하얀 빙벽 위에 울던 표범 송준호.  +   [빙벽 등반.]   |  2008. 10. 7. 17:33

참고: 설악산 토왕성 폭포 전경사진 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3784959

▲ 박인식 著 '사람의 산' ⓒ2008 한국의산천

하얀 빙벽 위에 울던 표범 - 송 준호 傳

송준호 1973년 1월 2일 설악산 토왕성 폭포 상단 단독등반 중 추락사

1.
악은 너무나 많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솜다리꽃, 박새품, 둥굴레, 함박꽃, 전나무, 아! 자작나무, 설악골, 용소골, 토막골, 잦은바위골, 곰골, 그리고 대청의 바람과 구름 그리고 동해까지…… 거기에다 설악시를 가지고 있고 또 설악가라는 노래까지 가지고 있다.

설악의 노래는 슬픈노래다. 아니, 서럽도록 아름다운 노래다.

“너와 나 다정하게 걷던 계곡길, 저 높은 봉우리에 폭풍우칠 적에….”

그설악의 가을에 산친구는 죽었다. 죽은 친구를 설악에 묻고 뒤돌아보며 뒤돌아보며 부르는 노래가 설악가이다.

“잘 있거라 설악아, 내 어이 잊으리요 꿈 같던 산행을, 잘 있거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

playstop

▲ 2008년 2월2~3일 전국 빙벽대회가 열린 토왕성폭포 ⓒ 2008 한국의산천

2

설악 초입 노루목에 가면 지금은 관광단지 C지구의 호텔과 여관들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설악의 맞은편 산자락에 사자(死者)의 마을이 있다. 설악을 사랑하다 결국 설악의 품에 안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곳에는 1969년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로 조난한 한국산악회의 열 동지를 비롯해 많은 산사람들의 무덤이 있다. 인가(認可)가 난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유일의 산악인 묘지인 셈이다.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인생에서 이름마저 남기지 않은 이름없는 산사람의 조그마한 묘지들이 모인 곳이다. 상석은 고사하고 비석마저 제대로 없는 이 무덤의 주인공들은 거의가 벚꽃처럼 젊은 나이에 산에서 져버렸다.

그 중에 엄홍석과 신현주라는 두 남녀의 무덤이 있다.두 사람은 설악에서 등반사고로 인하여 함께 죽었다. 송준호는 이 두 사람과 같은 절친한 산악회 회원이었고 엄홍석과는 자일 파트너였다. 그는 석과 주의 무덤에 자주 갔다.

▲ 노루목에 있는 산악인의 묘지. 오래전 토왕성 빙벽을 하러 갈때, 천화대, 석주길, 흑범길을 오르기 전에 설악동에 오면 이곳을 들렸다. 설악동 초입 관광단지 C지구의 호텔과 노루목 모텔 오른쪽개울 건너 뒤산에산악인 묘지가 있다.온통 건물로 둘러싸여 입구를 찾기가 쉽지않다.ⓒ 2008 한국의산천

3

설악과 외설악을 가르는 공룡능은 설악의 주능이다. 이 공룡능에서 흘러내리는 설악골과 잦은바위 사이를 천화대라는 암릉이 헐떡이며 치밀어 오르고 있다. 이 천화대에는 여러 지릉이 있다. 그 중에서 설악골에서 왕관봉과 범봉사이를 올라붙는 성곽 같은 암릉 하나가 특히 눈길을 끈다. 그 암릉을 송준호는 처음으로 올랐다. 그리고 그 능선에 이름을 붙였다. 엄홍석과 신현주의 이름 끝자를 따 '석·주길'이라고.

그는 손수 석주길이라 새겨넣은 동판을 제작해 그 암릉과 천화대가 만나는 곳에 붙였고, 그 길은 석주의 영전에 바쳐졌다. 그리하여 석주길이 태어났고, 석주는 그의 마음에 산과 인간이 만든 절대미를 조형했다. 산의 절대적인 추상미에 영혼을 빼앗긴 그는 조형과 석주의 산과 인간의 열정이 탄생시킨 환상에 늘 부담감을 가지고 살았다. 그리고 더욱 완전한 산행을 석주에게 바치기를 원하며 산으로 갔다.

▲천화대 석주길 끝에붙어있는 석주길 동판ⓒ 2008 한국의산천

4

제 말기 백령회가 설립되면서 우리나라에 근대 알피니즘이 보급되었다. 하지만 알피니즘의 등정주의나 등로주의의 대상이 될 만한 입지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70년대 후반 들어 해외원정으로 그 출구를 마련하기 전까지 알피니즘의 대상은 일부 짧은 암장에서의 기교적인 등반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나라의 알피니스트들에게 군계일학 격의 국내 등반 대상지가 된 곳이 딱 한 군데 남아 있었으니, 바로 설악의 토왕폭 빙벽등반이었다. 1970년대 초기의 빙벽장비와 기술로 그것은 바로 불가능이었고 절대였다. 그래서 그것은 한국 알피니스트의 존재 이유가 되기도 했다.

70년대 초반까지 히말라야 원정은 정찰대에 지나지 않았고 본대라도 거의 실패의 연속이었다. 때문에 국내에 아직 미등인 채 남아 있는 토왕폭의 아성은 더없이 높아만 갔다. 그것은 히말라야 8,000미터급 거봉 원정보다 더 귀한 등반이라는 예기도 돌았다. 그것은 살아있는 신화였다. 산선배에서 후배로 이어지면 결정(結晶)된 산행미의 실체였다. 그래서 당시의 산사람은 누구나 “토왕폭!”을 되뇌었다.

석주의 무덤이 있는 노루목은 토왕폭 맞은편에 자리잡은 산기슭이다. 화채봉에서 발원하여 함지덕, 칠성봉 일대에서 하늘에서 내려 드리운 듯한 얼음기둥이 자라나기 시작하는 겨울철, 노루목 석주의 무덤에 성묘를 하고 뒤돌아 설악을 바라보라. 그 얼음기둥의 머리 부분이 보일 것이다. 이 땅의 어떤 말도, 어떤 해석도 거부하는 그 토왕의 아름다움에 그 산사람의 온몸은 그가 평소 즐겨 부르던 '설악가'와 끝없이 암송하던 듀 프라의 '그 어느날'의 환청에 휩싸일 것이다.

그 어느 날 내가 산에서 죽을 때

오랜 산친구 자네에게 부탁하네.

내 피켈을 집어다오.

이 피켈이 치욕 속에 죽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네.

어딘가 아름다원 페이스에 가져다주게.

그리고 피켈만을 위한 작은 케른을 만들어다오.

그리고 그 위에 나의 피켈을 꽂아주게.

▲ 빙벽장비는 후배들에게 다 분양되었고, 남은 것은 오래 된워킹용 피켈. ⓒ 2008 한국의산천

동해에서 치솟는 아침 햇살을 받아 토왕의 얼굴이 수정처럼 빛날 때나, 설악이 온통 잿빛으로 가라앉을 무렵의 모습은 차라리 신성을 느끼게 한다. 그는 석주에게 재배하고 나서 토왕폭을 보며 단독등반을 결심했다. 그 빛나는 토왕폭 위에 석주의 피켈을 꽂고 그 곳에 작은 케른을 하나 쌓을 것을, 그리하여 그 토왕폭 초등을 석주에게 마칠 것을 다짐했다.

1973년의 새해 첫날밤, 토왕폭 단독등반을 결심한 송준호는 석주에게 편지를 썼다. 둘이 하나가 되어 이 세상 주소로는 찾아갈 수 없는 곳으로 그 엽서를 보샜다. 받는 사람 "석주 귀하", 주소는 "벽에서 노루목", 보내는 사람 "준". 그것은 3차원의 바깥 세계로 보내진 편지였다. 그리고 그는 토왕폭에서 결국 석주의 곁으로 갔다.

지금 그는 석주와 함께 노루목에 묻혀 있다. 이들 세 사람앞에 세워진 충혼비에는 "시간과 존재의 불협화음으로 공간을 활보하고 있는 악우(岳友)들이여! 철학적 경이로써 모둠된 그대들의 자취는 훗날 이 인자한 산정을 찾는 이들의 교훈일 것이다. 추억을 침묵으로 승화시킨 사람들, 그 대담한 의지로 회생하리라." 라고 새겨져 있다.

▲ 노루목 산악인의 묘지. 오설악 초입 관광단지 C지구의 호텔과 노루목 모텔 오른쪽개울 건너 뒤산에산악인 묘지가 있다.온통 건물로 둘러싸여 입구를 찾기가 쉽지않다.ⓒ 2008 한국의산천

5

준호, 그는 1947년 9월 20일 서울 전농동에서 태어났다. 외아들이었고 여동생이 둘 있었다. 배제중학교, 광성고등학교를 나왔다. 고2 때 부친이 대우중공업 인천공장 자재부장으로 전근하게 되어 인천으로 옮겨 살았다. 65년 광운전자공과대학에 입학, 3학년을 마치고 69년 육군에 입대했다가 72년 10월에 제대했다. 산과의 인연은 고2 때 맺어졌다.

중학교 시절부터 산을 익힌 나경봉씨와 62년 6월 백운대에 올라갔다가 우연히 그 맞은편에 우뚝 솟은 인수봉에서 바위하는 클라이머의 모습을 보았다. 힐끗 쳐다본 그 산쟁의의 오름의지는 그에게 산사람으로서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아!"하는 낮은 탄성을 송준호의 가슴으로부터 뽑아낸 그 클라이머의 실루엣에서 소년 송준호는 자신이 그 바위를 오르고 있는 내일의 모습을 보았다. 그해 여름방학 때 나경봉 씨와 송준호는 도봉산 선인봉으로 가서 박쥐코스를 다른 사람이 오르는 모습을 1주일이나 지켜본 후 그들을 본따 기어이 올라갔다. 그후 고교 졸업까지 둘이서만 그 어깨넘어식의 산행을 계속했다.

고3 때 산에서 요델산악회의 백인섭 씨를 만났다. 백인섭씨는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 산쟁이로, 요델산악회를 크게만든 사람이다. 백씨는 산악회를 이끌 재목감으로 탐이 나는 송준호에게 요델 산악회에 들어오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팀에 소속되어 구속받고 싶지 않다며 입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씨는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접근했다.

대학 1학년 때인 65년 겨울, 송준호는 선인봉 표범길을 몹시 오르고 싶어했다. 표범길은 백인섭씨 등의 요델 산악회에 의해 개척된 후 다시 등반한 사람이 없는 최난코스였다. 요델 산악회원도 아닐 뿐만 아니라 코스도 모르는 그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나경봉 씨와 그는 한 달간이나 계속 관찰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 해 첫눈이 왔다. 나경봉씨 집으로 전화가 왔다. 송준호가 산에 가자는 것이었다. 나경봉 씨는 무심히 배낭을 꾸려 그를 따라 선인봉으로 야영을 들어갔다. 다음날 송준호는 사진기를 꺼내들고 스타트 지점의 튀어나온 바위에 올라 표범길 일대를 찍어 댔다. 바위에는 약간씩 요철된 곳마다 간밤의 눈이 쌓여 있었다. 인화한 사진을 찾은 송준호는 사진의 눈 쌓인 부분을 연결하여 선을 그었다. 그 선은 기가 막히게도 백인섭 씨가 개척한 표범길과 일치했다. 제2의 선을 그은 것이다. 그는 곧바로 그 제2의 선을 따라등반에 성공했다.

다음해 봄, 그는 결국 요델 산악회에 입회했다. 그후 그의 산행은 요델의 든든한 뿌리 위에서 꽃 피었다. 같이 입회한 나경봉 씨와 엄홍석과 송준호는 의형제를 맺고 여러 등반코스를 개척했다. 1967년 우이암 전면코스, 68년 선인봉 요델 버트레스(일명 준호 버트레스), 68년 동계 설악산 표범골(잦은바위골)을 개척등반했다. 그리고 그해 7월, 설악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암릉에 새 코스를 내고 그 여름 설악산에 조난사한 의형제 엄홍석과 그의 친구신현주의 영전에 바치는, 그 설악산 석주길을 냈다. 70년 11월 인천 청학산 또띠바위 오버행 인공등반코스 등을 개척등반했으며 71년 1월에는 설악산 표범골 50미터 폭과 100미터 폭 빙벽등반에 성공했고, 72년 1월에는 설악산 용아장성을 동계초등했다.

▲ 지난해 가을에 오른 노적봉 '한편의 詩를 위한 길'리지 하강중에 촬영ⓒ 2008 한국의산천

6

짧은 기간 내에 그처럼 많은 초등반을 기록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는 거듭되는 산행이 습관적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언제나 노력했다. 가령 선인봉 표범길의 언더홀드를 스타트할 때 매번 자세를 바꾸었다. 언드홀드를 붙을 때 왼쪽 슬랩으로 붙는가 하면, 바로 언더홀드로 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와 같이 미세한 밸런스를 요구하는 지점은 누구나 경험에 의해 스스로 터득한 방식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그곳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는 말일까.

그는 178센티미터의 키에 75킬로그램이라는 좋은 체격에 클라이머로서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다. 한 손으로 턱걸이를 여러 번 할 정도로 완력이 좋았다.

남들이 오르기도 급급한 곳에서도 그는 언제나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는 그에게 눈을 주었다. 더 높은, 더 어려운 곳을 볼 수 있는 눈을.

도봉산 선인봉 표범길을 오르며 멀리 설악산의 흑범길을, 흑범길을 오르며 천화대를, 천화대를 오르며 석주길을, 석주길을 오르며 천화대에서 뻗어내린 염라길을 보았다. 여름의 용아장성을 오르며 눈 덮인 용아장성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더 높이, 더 높이 보았다. 표범골의 50미터 폭과 100미터 폭을 그는 하늘 높이 걸린 토왕폭으로 연결시키려는 꿈을 키웠다.

7

학도 기질을 살려 대부분 암벽장비를 자작해서 사용했다. 60년대 중반만 해도 카라비너는 구경조차 힘들었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도 않는 미군용 카라비너 대여섯 개만 있어도 암벽등반 베테랑으로 인정받던 때다.

무슨 자랑거리처럼 생각하여 길거리에서도 차고 다녔다. 송준호는 US군용 카라비너의 재질까지 연구하여 카라비너를 제작했다. 개폐스프링은 피아노 선이 사용되었다.

스프링이 피아노 선이라니! 그 카라비너가 개폐될 때 튀는 소리가 하나의 소나타가 되어 그의 혼을 온통 뒤흔들었으리라.

아버지가 근무하던 부천공장에서 테스트까지 거쳐 완성된 카라비너는 등반시 한 번도 벌어진 적이 없었다. 해머, 하켄, 일회용 스테인레스 아이스 하켄, 철제 지게배낭, 암벽등반용 사다리도 제작했으며 볼트 하켄까지 제작했다. 일제 볼트 하켄과 점핑세트가 국내에 보급된 것은 그보다 이삼 년 후인 76년이다.

등산가로서 송준호의 진면목은 빙벽등반에서 한결 돋보인다. 71년 1월 그는 설악산 잦은바위골의 50미터 폭과 100미터 폭 빙벽등반에 나섰다, 100미터 폭은 후배 오세진씨와 둘이서 붙었다. 오전 9시에 등반을 시작했으나 어둡도록 끝내지 못하고 달빛 속에서 등반을 계속했다. 그는 열 개의 아이스 하켄을 사용한 후 정상 10여미터를 남진 지점까지 도달하여 톱을 오세진 씨에게 넘겨주었다, 나머지 10여미터는 경사가 완만하여 등반하기가 매우 수월한 곳이었다. 용아장성 등반 때도 이런한 배려를 후배에게 자주 베풀었다. 등반을 끝내고 시계를 보니 오후 8시가 넘어 있었다.

그는 100미터 폭을 완등하는 데 10여 시간의 사투를 벌인 것이다. 요사이의 빙벽장비와 등반기술로는 납득하기 곤란한 시간이지만, 앞이빨 프론트가 없는 8치 아이젠에다 1미터가 넘는 길고 무거운 피켈 한 자루를 믿고, 바르트 훅이나 핀스크류도 없이 얼음이 온통 갈라지며 떨어져나가는 자작한 아이스하켄만 가지고 종일 스텝 컷팅을 하며 등반해야 한다면 열 시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설악산 100미터 폭포의 빙벽을 올랐다고 했을 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만큼 시대를 앞서가고 있었다.

그해 요델산악회의 최용준 씨가 토왕폭 상단에 도전해 하켄 10여 개를 설치하고 슬립했는데 하켄이 모두 빠져버렸다. 그토록 당시의 빙벽장비들은 부실했다. 그것에 반비례하여 토왕폭의 아성은 드높았고 송준호의 산행의지는 자연적으로 토왕폭을 겨냥하여 거슬러 올라갔다. 그해 가을 설악산 등반을 마치고 석주에 성묘갔던 그는 곁에 있던 홍경의 씨에게 토왕폭을 가리키며 "저길 오르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노루목 성묘를 마치고는 토왕폭 일대를 다음 겨울에 대비하여 정찰등반을 했다.

이듬해 12월 그는 다시 설악의 표범골을 찾아갔다. 피켈과 아이스 대거와 12치 아이젠만으로 50미터 폭을 15분 만에 뛰듯이 올랐다. 그야말로 한 마리의 표범이었다. 50미터 폭을 단숨에 넘은 그는 곧장 100미터 폭으로 달려갔다. 지난해 열 시간 소요된 100미터 폭을 불과 30분만에 올라섰다. 검은 표범은 설악의 골골을 향해 울부짖었다.

석주야! 토왕으로 간다, 토왕으로 간다. 토왕폭 위에 너를 위한 작은 케룬을 쌓고 그곳에 피켈을 꽂아주마.

100미터 폭을 30분 만에 오른 그는 너무나 기뻤다. 그것으로 토왕폭 등반에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아니, 확신이라 해도 좋을 것같았다. 후등자는 한 시간 사십 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100미터 폭 등반 중 송준호는 아이젠 밴드가 벗겨졌으나 균형을

잡고 고쳐맸다. 그 일화는 송준호의 이름과 더불어 산악계에 신화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의 장비라면100미터 폭을 30여 분만에 오를 수 있는 산쟁이가 드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70년대 초의 긴 피켈과 아이스 대거, 게다가 모래내금강의 12치 아이젠을 주고 오르라면 등반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8

1972년 12월 30일, 맑고 바람이 센 날이었다. 기온은 영하 10도 안팎으로 빙벽등반하기에 최적의 날씨였다. 오전 9시 잦은바위골로도 불리는 내설악 표범골의 비박지를 출발한 송준호는 설악동을 거쳐 11시경 토왕골 들목의 비룡산장에 도착했다. 토왕성 폭포하단을 우회해 중단의 완경사 부분에서 피켈만 들고 상단 스타트 지점을 관찰할 수 있는 곳까지 전진했다. 정찰을 마치고 중단의 잡목지대에 장비를 남겨두었다.

오후 2시 30분 하산하여 오후 5시 비룡산장으로 되돌아왔다. 이날 저녁 요델산악회의 선배인 서울 백인섭씨에게 토왕폭 상태가 빙벽등반하기에 최적이니 빨리 내려오라는 내용의 전보를 띄웠다.

'피켈, 아이젠, 아이스 하켄 지참, 31일 비행기편으로 오기 바람. 준호'

이튿날, 날씨는 맑고 바람은 여전히 강했다. 날씨는 조금 풀려 영하 3도. 새벽 3시에 일어나 설악동으로 가서 백인섭씨와 같은 산악회 후배인 박경립씨에게 전화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요델산악회에서는 72년에 표범골 등반, 그리고 그 다음해 겨울에 토왕폭 등반을 계획하고 있었다.)

11시 30분 비선대에서 일행 중 나머지 7명과 합류하여 용소골 40미터폭포에서 빙벽훈련을 마친 후 오후 6시 30분 양폭산장으로 갔다. 이날 저녁 요델 회원 정일주 씨에게 토왕성 빙벽등반의 촬영 및 기록을 위한 지원을 요청하고 토왕폭 단독등반을 결심했다.

1973년 새해 아침 날씨 역시 맑았다. 기온은 영하 8도.

송준호와 지원조 두 명은 10시 30분 양폭산장을 출발해 오후1시 30분 비룡폭포에 도착했다. 양초와 기타 등반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러 설악동에 다녀온 후 비룡산장에서 잤다. 이날 밤 송준호는 '석주에게'라는, 이승에서 저 세상으로 띄우는 편지를 썼다.

잘 있었니. 그 동안 나는 안정성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

1년 당겨 바로 내일 벽과의 감격적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네. 아니면 자네 품으로…

등반 날 나를 도와줄 S상대 O.B인 J와 P 두 악우를 소개하겠네(노루목에서). 기억해두고 깊이깊이 사귀어보고 싶은 두 사람일세. 지기(知己)도 아닌데 나를 써포트(Support)해 준다는 것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닐세. 석주도 고마워 할 거야, 현재 마음의 동요 없이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다. 전진, 용감한 후퇴,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한 스텝 한 스텝 가까워진다는 것은 표현하기 어려운 보람이네.

나는 확신한다. 아직 너는 나의 곁에 있다는 것을…..

석주가 있기 때문에 나는 더욱 열심히 한 발 한 발 힘차게 오를 것이다. 정상에서 대화를!

노루목에서 일배하세! 좁은 지면 메우기보다는 서로 힘찬 격려로써 서로를 지켜주면 좋을 걸세. 용아장성처럼…… 후회하지 않을 행동뿐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네. 나의 맘 한없이 메꾸고 싶지만 주고받을 얘기는 토왕성의 하얀 벽 꼭대기에서! 여유를 가져보세. 1월 1일 설날 이러한 일들이 있다는 것은 보람일세. 넘기기 싫은 하루였다네.

1973년 1월 2일 여전히 맑은 날씨에 기온은 영하 5도. 오전 8시 40분 송준호와 지원조를 포함한 세 명은 비룡산장을 출발했다. 등반계획은 상단 40미터 지점의 고드름기둥까지를 1피치로 잡고 그 곳에서 70미터 자일을 고정한 후 스타트 지점의 지원대원으로부터 120미터 자일을 지원받아 등반을 계속하여 두 시간 정도에 끝낸다는 것이었다.

이날 속초에는 한파주의보가 내렸고 빙질이 백빙에서 점차 청빙으로 변하가는 상태에서 송준호는 등반을 시작했다. 중식으로는 빵, 잼, 초콜릿, 쇠고기 통조림을 준비하고 간식으로는 꿀, 초콜릿, 껌, 사탕을 마련하여 간식 둘과 중식 하나를 지참했다.

장비는 9밀리미터 자일 70미터와 7밀리미터 굵기의 120미터 자일 두 동, 몽블랑 가이드 제품의 피켈, 헬멧, 모래내금강 12치 아이젠, 아이스 대거, 록 해머, 카라비너 17개, 래더 2개, 고글, 아이스 하켄 12개, 헤드램프가 전부였다.

하단을 우회한 그들은 장비를 놓아두었던 장소에서 30분 가량 휴식을 취했다. 12시 15분 중단의 빙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송준호는 70미터 자일의 한쪽 끝을 몸에 묶고 올랐으며 다른 한쪽 끝은 지원대원이 몸에 묶지 않고 30미터 정도 사려 배낭위에 얹었다. 중단은 30~50도 정도 경사진 빙벽이다. 바로 앞뒤에서 출발한 지원대원은 처음에는 5~6미터 간격으로 따라올라 앞선 송준호와의 간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사가 차츰 급해지면서 간격이 점차 벌어져 송준호가 상단 스타트 지점에 거의 다다랐을 때 간격을 35~40미터가 되었다. 지원대원의 손에 감겨 있던 줄은 점점 더 풀려 나갔다. 지원대원은 경사가 약간 심한 곳을 피해 옆으로 방향을 바꾸려 했다.

그 순간 지원대원은 밸런스가 깨지면서 '앙카(확보)'라고 소리치며 넘어져 떨어졌다. 그 바람에 지원대원과 연결된 자일로 목을 묶고 있던 송준호도 밑에서 갑작스레 잡아당기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함께 추락했다. 앙카(확보) 소리에 놀란 촬영담당 대원은 위를 쳐다보았다. 일부러인 것처럼 자연스레 떨어지는 송준호화 그 밑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지원대원을 목격했다. 먼저 떨어져 내리던 지원대원은 아이젠이 얼음에 걸리며 방향이 바뀌어져 중단의 완경사가 끝나는 부분에서 설사면 쪽으로 퉁겨 정지했다.

송준호는 계속 떨어지며 제동을 시도했다. 얼음이 갈라지는 듯한 찌익찌익소리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점차 가속도가 붙어 그의 몸은 중단을 빠져나가 하단으로 떨어져 120여미터의 허공을 날았다. 그대로 모든 것은 끝났다. 중단과 하단의 접합지점 빙벽 위에 그가 최후의 제동을 시도하며 휘드른 피켈은 얼음을 뚫고 빙벽에 굳게 박혀 있었다.

석·주와의 약속대로….

▲ 2008년 2월2~3일 전국 빙벽대회가 열린 토왕성폭포 ⓒ 2008 한국의산천

9

의 토왕폭 단독등반은 무모한 것이었을까?

토왕폭은 그후 국내의 유수한 산악회의 맹렬 산악인으로부터 끈질긴 도전을 받다가 1977년 크로니 산악회의 박영배 씨에 의해 초등되었다.

박영배 씨는 성공의 가장 큰 요인은 바르트 훅(Wart Hog)이라는 아이스 하켄 사용에 있었다고토로했다. 바르트 훅은 그후 토왕폭 등반에 필수로 등장한, 설치와 회수가 간편한 아이스 하켄이다. 그는 상단에만도 6박 7일이라는 긴 시간의 오름짓 끝에 등반에 성공했다. 그간 70여회의 하켄을 설치했다.

그에 비해 송준호는 기껏 12개의 하켄을 준비했고 등반 소요시간을 두 시간으로 잡았다.

그리고 73년 당시는 프론트 포인팅 기술이 제대로 도입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수직으로 일어선 빙벽은 등반 가능성 자체를 의심받고 있었다. 77년 초등 이후 토왕폭은 거듭 재등되었지만 송준호 이후 단독등반은 80년대 초까지 시도조차 한 사람이 없다.

이처럼 좋아진 장비, 기술변화와 등반시간을 비교해보면 송준호는 엄청난 무리를 감행한 것처럼 보인다. 단지 피켈과 아이스대거에 의지한 채 한국 최대의 빙벽을 두 시간만에 해치우려 했다니 말이다.

▲ 지난 해 가을 노적봉'한편의 詩를 위하여'코스를 등반하며 노적봉 정상에서 촬영한 토왕성 폭포 상단부 ⓒ 2008 한국의산천

오랫동안 자일 파트너였던 나경봉씨는 송준호가 무섭도록 차갑고 이지적인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10여 년간의 산행활동 중 송준호는 한 번도 미끄러지거나 추락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건 확률적으로 거의 제로에 가깝도록 어려운 일이다.

그가 얼마나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였나 하는 것은 사용한 장비나 글씨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등반 때마다 운행계획과 실제 등반과정을 자필로 남겼다. 그 차분한 글씨에서 표범 송준호를 연상하기란 정말 힘들다. 또 100미터 폭 등반 시 12치 아이젠의 프로트가 박히는 형태와 자세를 촬영해서 가장 균형잡힌 자세를 찾아냈다.

그러한 치밀성은 산행일지에 더욱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산행에 여러가지 원칙을 정해두고 있었다. 그 원칙은 종주에서부터 릿지, 암벽, 빙벽에 이르기까지 등반의 모든 분야에 걸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암,빙벽에서 각 개인의 빌레이 능력을 Body, Hip, Hand Belay 로 나누고 다시 One, Two,Three Karabiner, 즉 자일이 통과한 비너의 개수에 따라 분류하고 거기에 자일이 확보자용 카라비너에 감긴 횟수에 따른 구분까지 한 확보교본을 작성해두고 있었다.

하루에 담배 두 갑을 피우던 골초가 산행을 위해 절연했으며 금주까지 단행했다. 군생활 중에도 그는 산행을 계속했다. 위령제에 찾아온 그의 부대친구들에 의하면, 재경부대에 근무하게 된 덕도 있지만 산행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신체단련을 하는 그의 산행의지가 지휘관을 비롯한 동료들의 마음을 움직여 산행을 가능하도록 힘써주었다고 한다.

69년 석주길 개척등반, 70년 설악산 용아장성 등반, 인천 청악산 오버행 인공등반, 71년 설악산 표범골 빙벽등반, 72년 1월 용아장성 동계초등이 사병으로서의 군복무시절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놀랍기만 하다.

그는 체질적인 단독등반가였다.

서울 근교 암장과 설악산에서 많은 단독등반을 경험했다. 토왕폭 단독등반 행위는 일시적인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평소 등반 시 그는 매우 적은 양의 장비를 사용했다. 하켄 열 개가 소요되는 코스를 그는 하켄 두 세개로 해치웠다. 이러한 등반방식은 요즈음의 등반조류로 봐서는 바보짓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공적인 장비를 적게 사용하는 것이 지배적인 미덕인 그 당시의 흐름에 그는 매우 충식했을 뿐이다. 누구나 필요한 만큼의 확보지점과 장비와 시간을 사용한다. 그 확보점의 소요 수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며, 스스로의 등반 리듬에 의해 그 수를 줄여나가는 것이 진보적인 등반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토왕폭에서 송준호가 택한 장비와 예정 등반시간은 그에게 최선의 것이지 무리라 볼 수 없다.

그가 무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후에 토왕폭을 등반한 후배들에 의해 입증된다. 70년대 말부터 겨울 표범골의 100미터 폭을 30분만에 오른 산쟁이들이 나타났으며, 겨울철에는 두 명이 토왕폭 상단을 일곱시간 만에 올랐다. 이 팀의 경우 한 사람당 세 시간 반이 소요된 것인데, 두 사람이 오르기 위한 확보시간을 제한다면 한사람이 오르는 데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된 셈이다. 그 두 시간은 바로 송준호가 꿈꾸던 시간과 일치한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 당시의 장비로 요즈음의 최신 장비를 갖춘 클라이머에 맞먹는 등반력을 가진 그의 능력이다. 그는 7~8년 정도 앞선 사람이었다.

'얼음 송곳'이라는 뜻의 아이스 대거는 빙벽이 아니라 설벽용으로 제작된 장비다. 빙벽용으로 국내에 잘못 인식된 아이스 대거를 쥐고 토왕폭 등반을 시도한 것이 화를 부른 게 아닌가 하는 지적도 있지만, 잦은바위골의 100미터 폭에서 눈에 꽂는 장비를 얼음에 꽂으며 성공리에 올라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의 토왕폭에서의 죽음은 그 스스로나, 미끄러졌던 지원조의 잘못 때문은 아니었다.

송준호보다 더 높고 험한 산을 오른 사람은 많다.

하지만 그처럼 산행의 동기가 오직 산이었던 사람은 흔치 않다. 우리가 진정한 산쟁이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영원한 삶의 순례자로서 언제나 새로운 산 앞에 다시 서야 하는 숙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한 산쟁이의 숙명을 받다들이다가 그가 평소 즐겨 쓰던 제2의 선이라는, 현실에서 이상으로 이어지는 초월의지의 선을 타고 산쟁이답게 간 것이다.

▲ 설악산 C단지 숙박업소촌 뒤에 있는 산악인 10동지 묘 ⓒ 2008 한국의산천

10

2의 선, 그것은 어떠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전달되는 것일까?

1973년 1월 2일 새벽, 그의 작별인사는 제2의 선을 타고 서울의 어떤 여자에게 현몽했다. 송준호가 토왕폭에서 떨어지는 꿈을 꾼 그녀가 놀라 깨어났다. 송준호는 등반에 그녀가 짜준 목도리, 모자, 장갑 등을 끼고 있었다. 토왕폭 등반을 깨끗하게 마무리하면 그는 스위스의 등산학교로 유학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73년 1월 5일 오후 2시 그녀는 토왕폭 등반을 마치고 올 송준호와 중앙극장앞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 극장에서 상영 중이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기로 약속했던 그는 스스로 바람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그후 꿈에 다시 나타난 그는 그 영화를 보라고 자꾸 보채고는 사라졌다. 예전에 그 영화를 보았지만 그녀는 꿈속의 송준호 때문에 그 영화를 다시 보러 갔다. 그리고 송준호의 뜻을 알았다. 그 영화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처럼 살아가달라는 그의 뜻을.

그는 그녀를 ‘까만돌’이라 불렀다.

그해 가을 요델 산악회는 송준호의 추모등반을 설악산 용아장성에서 갖고, 추모동판을 제14봉에 부착했다. 까만돌은 그 동판뒤에 송준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고인의 뜻대로 강하게 살아가겠노라는 그 편지는 제2의 선을 타고 송준호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1974년 1월 2일 송준호의 1주기에 까만돌은 어떤 남자와 설악의 노루목을 찾았다. 송준호에게 두 번 절한 그 남자는 송준호에게 산친구로서, 남자의 이름으로 약속했다. 당신 뜻대로 까만돌이 잘 살아가도록 하겠노라고, 그는 송준호를 잘 알고 있던 동양산악회회원이었고 서울농대출신의 젊은 상록수였다. 까만돌과 상록수는 그 이듬해 결혼했다. 결혼 후 상록수는 고향인 전북 장수로 귀향해 어릴 적 꿈인 목장을 이루었다. 스칼렛 오하라 같은 까만돌과 그 상록수의 집념으로 자그마하던 목장이 5만여 평의 넓이로 늘어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2008년 2월2~3일 전국 빙벽대회가 열린 토왕성폭포 ⓒ 2008 한국의산천

11

기 하나 하지.

옛날 어느 산에 폭포가 하나 있었어.

그 폭포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높고 곧은 폭포였지. 그 폭포가 얼마나 높은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떨어지는지 아무도 몰랐어. 그런데 그걸 아는 이가 하나 있었어. 그는 노래꾼이었지. 그의 이름은 수영이었고 성은 김을 썼지. 그 사람 노랠 한 번 들어봐.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한 순간조차 마음에 두지 않고

나타(懶楕)와 안정(安定)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헌데 말이야, 곧은 소리를 내며 곧게 떨어지던 그 폭포가 어느 겨울날 얼어붙은 후에 풀리질 않았어. 계절을 잃은 폭포는 더 이상 노래하질 않았던 게야. 곧은 폭포소리가 얼어붙은 게야. 얼마나 답답했겠어. 폭포나 보는 사람이나 말이야. 그래도 다들 편히 잠자고 있을 때 곧은 폭포소리를 못내 그리워하던 어떤 소년이 있어 폭포를 풀러 하얗게 얼어붙은 그 폭포를 올라간 게야. 미끄러져도 오르고 떨어져도 오르고 또 올라 소년은 폭포의 언 얼굴에 매달렸어. 그는 젓빛 손으로 차가운 얼음덩어리를 두들겼어. 폭포야 풀려라, 폭포야 한을 폴어라 하고 두드린 게야.

두드리다 두드리다 두 주먹은 핏빛 멍이 들었어. 이제는 그의 마음보다 차가운 폭포가 소리칠 때도 되었건만, 그의 가슴보다 답답한 폭포는 풀릴 만도 하였건만 폭포는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어. 폭포는 가슴마저 얼어붙은 게야. 그러다, 그러다가 말이야 문득 폭포는 응얼거리기 시작했어.

'네 머리로 이 몸을……'

그는 결국 그 폭포를 푸는 열쇠구멍에 자신의 머리를, 온몸을 던져버린 게야. 그래서 그 폭포는 계절과 밤낮을 되찾고 다시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기 시작한 게야. 동해에 솟는 맑은 해가 그 폭포를 비출 때면 지금도 머리 깨어진 그 소년의 붉은 피가 폭포수가 되어 곧게 곧게 그 절벽의 폭포로 떨어지고 있지.

그러다가 겨울이면 그 폭포는 하얀 얼음으로 그 소년의 넋을 다시 결정시키곤 하는 게야. -끝- [옮긴이 한국의산천]

▲ 노루목 산악인의 묘지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변분들도 잘 모릅니다. 위치는 설악산 관광단지 C지구 노루목 모텔 오른쪽 가로등 옆 개울 건너, 사진의 오른쪽 건물 바로 뒤편에 산악인 묘지가 자리하고 있다. 설악산을 찾는 일이 있으시면 먼저가신 선배 산악인들에게 간단하게 소주 한잔,묵념이라도 바치고 간다면 그 영혼들도기뻐할것입니다.ⓒ 2008 한국의산천

덧붙이는 글

2003년 9월 10일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농업 개방 협상 반대시위를 벌이던 이경해(56)전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회장이 미리 준비해간 흉기로 가슴을 찔러 자해(自害)한 끝에 사망하였습니다. 윗 글에 나오는상록수가 바로 이경해씨입니다.

관련글

[이용대의 나는 오늘도 산에 오른다]첫 선등 드디어 머리를 올리다

선비같던 자일 파트너 이경해, 지금은 하늘에

선등은 암벽등반에서 또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로프의 끝을 매고 수직의 세계를 오르는 것은 단독 등반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
동료와 줄을 함께 묶고 있긴 하지만 오르는 도중 일어나는 어렵고 위험한 상황을 혼자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선등자에게는 추락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전광석화처럼 빠른 판단력 및 집중력이 필요하다.

선등은 클라이머로 성숙하기 위한 성장통이요 한번쯤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이며 자기시험의 기회이기도 하다. 흔히 선등에 대해 “머리를 올린다”고 말하는데, 머리를 올리는 것이 상투를 튼다는 의미 즉 어른이 된다는 뜻이기 때문에 선등은 클라이머로 태어나기 위한 성인의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선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평생 선등 한번 못한 채 산을 떠나는 사람도 많다. 등산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불확실성에 도전하는 것이라면 선등자는 그런 흥분을 만끽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20대 후반이던 1960년대 내 첫 선등의 자일 파트너는 이경해다. 그는 당시 서울시립농대에 재학중인 조용하고 온화한 학생이었다. 내가 세 번째 맞이한 바위에서 선등을 자처했을 때 그는 걱정스런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로프의 끝을 묶은 뒤 그를 향해 “경해야, 혹 내가 등반 도중 떨어지면 네가 내 목숨을 확실하게 챙겨(확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형님의 신중함을 저는 믿습니다”라고 응수했을 뿐이다. 선배가 신으로 군림하던 시절이었으니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첫 선등에서 나를 따른 이경해는 농대 졸업 후 낙후한 농촌경제를 살리겠다며 전북 장수로 귀농했다. 산지의 자갈밭을 수만평의 농장으로 일궜고 후계자 육성에도 앞장서 유엔식량농업기구(FAO)로부터 ‘세계의 농부상’을 수상했다. 그가 피와 땀으로 일군 농장이 낙농 교육장으로 지정됐고 농촌 청년들이 문하로 모였다. 이경해가 그들을 열정적으로 지도했으니 사람들은 현대판 상록수라고 격찬했다.

1990년 그는 한국농어민후계자협의회장 자격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우루과이라운드 협상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관했다. 그 자리에서 협상을 반대하며 등산용 칼로 할복했는데 그 칼이 내가 귀농 기념으로 선물한 스위스제 군용 나이프였다. 몇 년간 산행을 같이했지만 그가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그때 나는 크게 놀랐다.

그는 설악산 적설기 등반에서도 남다른 체력으로 반팔셔츠 차림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힘겨워 하는 후배의 짐마저 지는 등 힘자랑은 했어도 조용한 선비 같았다.

그는 2003년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린 멕시코 칸쿤에서 위기에 처한 우리 농민의 절박한 입지를 설명하기 위해 극한적인 의사 전달 수단으로 두 번째 자해를 선택했고 결국 이승을 등졌다.

알피니스트로서 그의 마지막 모습은 <에베레스트 100일의 장정>이란 책 속에 세월의 무게가 실린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겨졌는데 나는 그것을 보면 지금도 인수봉을 함께 오르던 옛일이 떠오른다.[이용대]

▲ 밤그늘이 드리운 물치항에서 바라 본 설악산 능선 ⓒ 2008 한국의산천

먼저가신 山岳人 여러분께 명복을 빕니다.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모두가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내 어이 잊으리오 꿈같은 산행을~

잘있거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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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계 등반 기술  +   [빙벽 등반.]   |  2008. 3. 3. 19:11

1. 겨울산의 의류와 장비
1.1 의류의 섬유와 원단
1.2 옷입는 방법 (Layering)
1.3 의류, 모자, 장갑
1.4 양말, 텐트슈즈, 스패츠
1.5 해드램프, 침낭, 매트리스
2. 동계등반장비(Snow & Ice Equipment)
2.1 픽켈 (Pickel)
2.2 크램폰 (Crampon, 아이젠)
2.3 아이스 피톤 (Ice Piton)
2.4 동계 등산화
2.5 그밖의 장비들
3. 설상등반기술(Snow Climbing)
4. 빙벽등반기술(Ice Climbing)
3.1 기본보행기술
3.2 알파인스틱 보행법
3.3 설벽등반기술
3.4 설벽하산기술
3.5 자기제동 (Self Arrest)
3.6 눈에서의 확보물 I
3.7 눈에서의 확보물 II
3.8 눈에서의 확보방법
3.9 안자일렌
4.1 스텝커팅
4.2 크램폰 사용
4.3 프랑스식 등반기술
4.4 프랑스식 하산기술
4.5 프론트포인팅
4.6 픽켈기술
4.7 빙벽에서의 확보와 하강
5. 수직빙벽등반기술(Vertical Ice Climbing)
5.1 장비의 사용
5.2 스윙기술
5.3 프론트 포인팅
5.4 수직빙벽등반 자세와 동작
5.5 아이스피톤 설치
5.6 아이스피톤 설치방법
5.7 확보, 하강 그리고 훈련
5.8 혼합등반 (Mixed Climbing)
6. 겨울산의 위험과 조난대책
7. 겨울산의 생활기술
6.1 조난사례
6.2 눈사태
6.3 크레바스와 준비
6.4 크레바스 통과요령
6.5 크레바스 추락구조
6.6 크레바스 탈출
6.7 도르래를 이용한 구조
6.8 저체온증
6.9 동 상
7.1 막영기술
7.2 설동기술
7.3 이글루
7.4 취사와 연료
7.5 동계 등반식량
7.6 겨울산(고산)의 명칭
출처:코오롱 등산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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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철 빙벽 등반.  +   [빙벽 등반.]   |  2007. 1. 14. 06:27

빙벽등반이란 행위는 암벽등반과 하나가 되는 동시에 또 다른 분야의 하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흔히 사람들은 암벽등반 보다 빙벽등반이 더 쉽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를 들어보면 2종류의 꼬챙이(손에는: 바일, 두 자루), (발에는: 크램펀, 두 쪽)를 얼음에 찍고 올라가는데 뭐가 어렵냐고 하는 것이다.
흔히 우리나라의 4대 빙폭(토왕성 폭포, 소토왕 폭포, 대승 폭포, 소승 폭포)들을 잠깐 이야기 하자면 짧은 경험에 빙벽등반을 접한 사람들은 그 얼음이 그 얼음 같아 빙벽등반이 쉽다는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난이도를 갖춘 빙폭들의 성질들을 보면 고드름 형, 버섯 형, 오버행, 얼음 기둥, 그레파스 빙면들로 산재해 있음을 결국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얼음을 경험해 보면 상상을 초월한 극한 등반의 행위로 결단의 순간들이 등반자의 숨통을 멈추게 하는 연속에 순간들이란 것이다.
그러나 중급에 해당되는 구곡폭포(강촌 소재)의 난이도를 이야기 한다면 그 행위와 재미로 비추어 볼 때 암벽등반보다 쉬울 수 있으며 빙벽등반 그 자체가 더욱 즐겁고, 순간에 희열들은 암벽등반에 몇 갑절 이상으로 느껴 볼 수 있는 것이 또한 빙벽등반이라 말할 수 있다.
반면에 빙벽등반은 암벽등반에 비해 위험하고 힘들다고들 하는 사람도 있다. 빙폭이 무너져 내리면, 낙빙이 떨어지면, 겨울이라 추워서 등등 이러한 생각은 빙벽등반이 더욱 쉽다는 사람보다 문제가 더욱 크다. 할 수 있다.
삶에 행복이 산(겨울/빙벽)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정적인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은 평생 약이 없는 것이 더욱 큰 위험이며 힘든 것이다. 다시 말해 올바른 등반교육 습득과 안전수칙을 지키는 한 등반에 행위는 우리의 삶보다도 안전하고 솔직한 것이다.
본인은 주위사람에게 이런 말을 가끔 이야기한다. “빙벽등반을 접하지 않고서 암벽등반을 논하지 말라.”
이 뜻은 암벽등반만 하지 말라. 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빙벽등반을 경험하고 이러한 계절의 상황들을 적응하여 등반가, 산악인으로서의 발전을 양극화 시키자는 것이며 이는 암벽등반의 등반능력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서로 간에(암/빙벽과 사계절의 대처 능력) 협조적 능률을 자신에게 가져오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암벽등반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함이라면 빙벽등반의 행위를 꼭 실천해야 된다는 뜻이다.
등반 형태에 있어, 어느 것이 쉽고 어느 것이 어렵다고 논의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인은 빙벽등반을 이야기 하자면 암벽등반은 난이도를 떠나 몇 번에 경험만으로도 올라갈 수(선등) 있지만 빙벽등반은 생소한 장비의 정황과 숙련이 극도로 필요한 행위인 만큼 여러 정황들이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암벽등반의 고정적 확보물은 손쉽게 설치함을 떠나 빙벽등반은 스스로가 확보물을 설치해야 하며, 설치할 때의 과정들이 암벽등반과 달리 쉽지 않다는 것이다.
즉, 암벽등반과 달리 오르기만 하면 안 된다는 것이 빙벽등반이며 오르는 능력을 떠나 빙면에 성질과 특성 등을 파악하고 확보시스템에 관한 능력과 숙달이 완전했을 때 비로서 등반의 행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암벽등반은 자신의 손과 발, 즉, 피부로서 바위의 감촉들을 쉽게 느낄 수 있으나 빙벽장비들은 둔탁 한(쇠, 의류, 장갑 등) 것들로 손과 발이 대신하여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자신에게 직접적인 감각이 쉽게 전해 올 수가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빙벽등반을 접하다 보면 손과 발의 감각이 서서히 교감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며 결국 무언의 장비들이 자신과 함께 숨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때 비로서 무한한 마운틴 오르가즘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자신의 등반능력이 탈바꿈 되어 가는 좋은 징조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매력이 빙벽등반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 암벽등반 기술 향상에 또 다른 지름길이 되는 비결인 것이다.
암벽루트는 1~2번 오르고 나면 루트의 섭리를 암시적으로 외우게 된다. 결국 창조적인 등반이 반감된다는 것이다.(바위에 형태는 변하지 않음.)
그러나 빙벽에 매력은 암벽등반의 루트처럼 늘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고 기온과 빙폭의 수량에 따라 얼음의 형태가 늘 변화되어 여러 형태의 등반행위를 표현, 적응하며 폭넓은 등반의 행위를 창출해 낼 수 있다는 것이 또 다른 매력인 것이다.
요즘은 각 지역마다 인공 암장(실내/실외)과 같이 수많은 인공 빙장(실내/실외)들이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다. 이러한 인공 빙장들의 출현에 더불어 빙벽 애호가들의 행복은 1년 중 겨울만을 생각하며 지낸다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인공 빙장에 장점은 우선 자연적 빙폭에 비해 인위적으로 수직에 빙폭으로 100% 형성되었다는 것과 어프러치(차에서 내리자마자 빙장)가 매우 수월하여 고난이도의 등반을 편리하게 맞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자연(산)에 섭리와 대처, 대비에 관한 본질에 관점이 산악 관에서 스포츠로 변질되어 연약한 수순으로 내려앉는다는 것이 또한 단점이기도 하다.
진정한 산에서의 첫 번째 실력은 등반능력이 아니라 우선 겨울이라는 수많은 상황적 현실을 맞이하며, 적응할 줄 아는 것이 최고의 등반실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순이 요즘 시대(등반 계)에 급속도록 망각되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스포츠는 복잡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좋아한다는 산에서의 대상지는 준비와 시간이 복잡하다.
우리는 복잡함에 의한 준비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복잡함을 즐겨할 때 우리는 비로서 높고, 험한 산을 안전하게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즉, 인공 빙장에서의 등반행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의 안착만은 찾지 말자는 뜻이며 등반행위에 본질은 힘들고, 추운 줄 알면서도 인위적인 대상이 아닌 자연 속으로 찾아나서는 가운데 준비하는 본래의 등반철학을 행하자는 것이다.

권기열 등산 학교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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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계 등반 장비  +   [빙벽 등반.]   |  2006. 9. 13. 17:26

자료 출처ㅡ정승권 등산 학교ㅡ신구 대학 산악부.

    ◐◑동계 등반 장비◐◑

    의류

    동계 등반 의류는 날씨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뭐라고 단정지을 순 없다. 보온과 행동성은 서로 상대적 이여서 등반 형태에 따라 의류 정도가 다를 수가 있다.
    그러나 기본 적으로 착용해야 할 복장은 속옷, 보온옷, 겉옷으로 나눌 수 있으며, 그밖에 방한복, 양말, 모자, 장갑을 들 수 있다.

    속 옷

    속옷은 일상 생활에서 입는 겨울 내복과 같은 용도인데, 등산용은 소재가 좀 다르다. 등산은 많은 에너지 소모로 땀(수분)을 많이 흘리게 되어, 피부에 접촉하는 기초 복장인 내복을 젖게 한다.
    땀에 젖은 옷이 식으면 체온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추위를 빨리 느끼게 된다.
    이래서 겨울 산에서는 발수가 빨리 이루어져야 하며, 발수 능력이 좋은 제품을 선택해야 한다.
    대체로 화학 섬유( 포리 프로필렌, 포리 에스터 등 )로 된 것이 발수 기능이 좋으며, 무게도 가볍다. 그러나 화학 섬유는 장기간 착용했을 때 정전기 등으로 그 착용 감이 떨어지는 것이 단점이다. 속옷은 상하의 모두 입는다.

    보온 옷

    속옷 겉에 입는 보온 옷은 예전에 털실로 짠 스웨터로 대용했으나, 화학 소재의 개발로 착용 감과 보온성을 더욱 높일 수 있게 되었다. 일명 파일이라고 부르는 이 보온 옷은 짧은 시간동안 원단 직조 방법과 소재의 개발로 많이 변화되었다.
    역시 가벼운 소재와 원단을 기능적으로 디자인 할 수 있다는 것일 가장 큰 특징이다.
    대표적인 소재가 플리스 이다. 보온 옷은 활동성을 좋게 하기 위해서 하의는 잘 입지 않는다.

    겉 옷

    겉옷은 방풍복과 방한복으로 나눌 수 있다. 방풍복은 바람과 눈 또는 비로 인해 속옷과 보온 옷을 보호하여 보온을 유지해 주는 기능이다.
    그러나 문제는 에너지 소모로 인한 몸 안에서 배출되는 땀(수분)의 배출인데, 배출이 되지 않으면 속옷과 겉옷을 젖게 하며, 매우 추운 날씨에는 방풍옷 안쪽에 얼음으로 남게 된다.
    발수 못지 않게 방수 또한 중요한데, 이런 기능을 모두 갖춘 원단 소재가 고아텍스(Gore-Tex)이다. 방풍복은 상의에 머리를 보온할 수 있는 후두(모자)가 꼭 붙어있어야 한다.
    방한복은 고아텍스(Gore-Tex) 원단이나 혹은 나이론 원단의 방풍복 같은 형태로 안감과 겉감 사이에 보온재로 화학 섬유나 우모(거위털)를 집어넣어 보온력을 매우 우수하게 한 기능의 옷이다.
    방풍복이나 특히 방한복은 활동성을 좋게 하기 위해서 하의는 잘 입지 않는다.

    양 말
    발은 신발(이중화)에 보온력이 있어 여러 켤레 겹쳐서 신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양말이 여러 겹이 되면 발을 압박할 수 있어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아 동상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여러 겹의 양말을 신으려고 큰 신발을 신는다면 보행의 어려움이 있어, 오히려 이 점이 보온력 유지보다 맹점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첫 번째 착용감, 두 번째 보온성, 세 번째 내구성인데, 착용 감은 직조 방법과 관계가 있어 잘 선택해야 한다.

    장 갑

    잡일을 할 때하는 화학섬유(포리 프로필렌, 플리스)로 된 얇은 장갑이 적당하며, 빙벽이나 혼합등반용은 보온 소재가 들어있고 일명 글로브라고 하는 다섯 손가락형이 좋다.
    그밖에 보온용으로는 오리털이 들어있는 다운 미튼이 주로 사용된다.

    모 자

    햇빛을 막아주는 단순한 기능과 몸의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기능이 있다. 발과 몸이 추우면 양말을 더 신는 것보다는 모자를 쓰는 것이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열은 위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스 패 츠

    눈이 신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방수와 발수성이 좋은 제품을 선택해야 하는데, 고어텍스 원단을 사용한 제품이 좋다.

    수퍼게이트

    스패츠처럼 눈이 신발 속을 들어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이지만 스패츠보다 신발을 더 감싸주게 되어있어 보온력이 더 우수하며, 내구성도 강하다.
    고산등반용에 적합하며 방수와 발수성이 좋은 고어텍스 원단의 제품이 좋다.

    오버슈즈

    신발 전체를 감싸는 특징 때문에 수퍼게이트보다 보온력에서 더 우수하지만 섬세한 등반을 요구하는 곳, 즉 빙벽등반이나 혼합등반에서는 부적합하다. 역시 방수와 발수성이 좋은 고어 텍스 원단이 좋다.


    신발(이중화)

    동계용 신발인 이중화는 발의 보온과 아이젠의 착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부드럽지 못하다.
    매우 투박하고 뻣뻣하기 때문에 발목이 꺾이지 않아 맨 땅에서 걷기가 매우 불편하다.
    그러나 이런 기능들이 눈이나 얼음에서 오히려 걷기에 편하고 안정되며, 더욱이 급경사의 빙벽과 암벽에서 이런 기능들이 결정적인 효력을 발휘한다. 이 이중화는 겉 신발과 속 신발의 이중 구조로 되어있어 보온력도 우수하지만 관리하기도 매우 편리하다.
    특히 장기간 등반을 해야 하는 고산에서는 그 기능이 매우 뛰어나다.
    이밖에 보온력보다는 착용 감을 우선으로 하는 빙벽 등반이나 혼합 등반만을 위한 신발이 있다. 이런 신발들은 이중화의 구조가 아닌 단일화 이여서 보온력이 이중화보다는 다소 떨어지긴 하지만 가볍고 착용 감이 좋아 섬세한 등반에서는 뛰어난 기능을 발휘한다.

    장 비

    피 켈

    피켈은 눈이나 얼음 또는 바위에서 몸의 균형을 유지하고 지지력 얻는 장비이다. 피켈의 각부 명칭은 피크, 브레이드, 스파이크, 샤프트로 나뉘고, 좀 더 세부적으로 헤드, 카라비나 홀, 훼룰 부분을 나눌 수 있다.
    피크는 눈이나 얼음에 박거나 바위 홀드 면에 걸어 지지력을 얻는 기능이며, 브레이드는 눈이나 얼음 면을 깍거나 파내는 기능이고, 스파이크는 단단한 얼음 사면에서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정도의 기능이다. 이 세 부위를 연결 지지하는 지지대인 샤프트는 피켈의 기둥 역할인데, 부위별 각기 기능에 있어서 피크는 모양과 길이, 브레이드는 부착여부, 샤프트는 길이, 스파이크는 모양 등이 등반 방식에 따라서 결정된다.



    아이스 바일

    피켈과 같은 모양과 기능에서 단지 브레이드 대신 망치 머리가 달려 있어 하켄을 타격 할 수 있는 장비이다.
    이 아이스바일은 샤프트의 길이가 피켈처럼 길지 않은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하켄을 타격 할 수 없는 피켈의 역할을 대신 하는 장비라 할 수 있다.

      ◐◑완경사 오르기◐◑

      등산이 태동한 알프스에서 프랑스 등반가들이 만들어낸 등반기술이어서 프랑스식 등반기술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용어조차 프랑스 언어를 적용시킨다.
      이 프랑스식 등반기술은 이후 독일, 오스트리아 등반가들에 의해 개발된 프론트 포인팅 기술로 인해 점 점 퇴색되었지 만, 몇 가지의 기술들은 현재에도 매우 중요한 등반기술이 되고 있다.
      이 프랑스식 등반기술은 발의 기술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식 등반기술, 특히 발 자세는 고산등반에서 아주 긴요하게 쓰이게 된다.

      발 자세

      ( 평지 걷기- 삐에 마르슈 Pied Marche )

      아이젠은 미끈한 얼음 면에 지지력을 얻는 안전한 장비이지만 잘못된 보행 법은 오히려 위험을 초래할 수가 있다. 아이젠 발톱이 옷깃이나 신발에 걸려 몸의 균형을 깨트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발을 일자로 나란히 두고, 그 간격을 조금 버려서 걸어야 하며, 아이젠 바닥 발톱이 사면에 모두 박힐 수 있도록 발을 들었다 놓는다. 이때 힘을 조금을 가 할 수 있으면 좋다.
      이때 중요한 건 한 발이 움직일 때 반대쪽 발에 체중이 완벽하게 이동 되어있어야만 한다.
      이런 완벽한 체중이동의 동작은 앞으로 설명할 모든 등반자세에서 잊어서는 안될 기본 원칙이 된다.
      이렇게 걷는 보행 법의 명칭을 삐에 마르슈 라고 한다. 프랑스어인 삐에는 발을 뜻하며 마르슈는 행진을 뜻한다. 평지와 평균각도 10도의 경사면을 오를 수 있다.

      ( 사면 걷기 1 - 삐에 당 까나르 Pied en Canard )

      삐에 마르쉬의 발 자세로 오를 수 없는 사면은 발 앞쪽을 벌린 팔(八)자 걸음으로 변환시킨다. 이렇게 되면 구부릴 수 없는 발목 관절의 한계를 극복하여 사면에서 몸의 안정된 자세를 유지하게 된다.
      이런 발 자세를 삐에 앙 까나르 라고 한다. 즉 오리걸음이라는 뜻이다.
      평균각도 20도 까지 경사면을 오를 수 있다.

      ( 사면 걷기 2 - 삐에 다 쁠라 Pied a Plat )

      오리걸음인 삐에 당 까나르로 몸의 균형을 유지 할 수 없는 조금 경사가 급한 사면에서는 뒤로 또는 옆으로 걷는 자세를 취한다.
      구부릴 수 없는 발목 관절의 한계로 인하여 몸의 균형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역동작의 발 자세를 취해야 한다. 이런 발 자세를 삐에 아 쁠라 라고 하는데, 사면에서 발을 평평하게 둬야 한다는 뜻이며, 평균각도 45도 경사면을 오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뒤로 오르는 자세가 되는데, 이때 체중이 발뒤꿈치 쪽 아이젠 발톱에 많이 실리게 할 수록 더욱 안정된 자세가 유지된다. 이런 자세가 되려면 기마 자세, 즉 무릎관절을 많이 구부려 엉덩이가 사면에 가깝게 해야 되며, 이런 자세는 매우 힘든 동작으로 다리에 힘을 많이 요구하게 된다.

      ( 사면 걷기 3 - 삐에 다씨 Pied Assis )

      삐에 다 쁠라 자세로 사면을 오르다가 다리에 피로를 풀기 위해 안정되게 쉬는 자세가 삐에 다씨이다.
      특히 한 자루의 피켈로 가장 급사면을 오를 수 있는 기술인 삐올레 앙크르의 등반기술에서 피켈을 타격할 때에 이자세가 필요하며, 내려올 때에도 중요한 자세이다.

      ( 사면 걷기 4 - 프론트 포인팅 Pront Pointing )

      삐에 아 쁠라의 발 자세로 몸의 균형을 유지 할 수 없는 급경사는 아이젠 앞 발톱을 이용한 프론트 포인팅의 발 자세를 취한다.
      사면을 마주보고 걷는 이 발 자세는 수직뿐 아니라 역 경사에서도 매우 안정감을 갖는다.
      이 프론트 포인팅의 발 자세는 프랑스식 등반기술의 범주에서 벗어나지만 함께 병행하여 사용되어 진다.

      ( 사면 걷기 5 - 삐에 트와지엠 Pied Troisieme )

      이 발 자세는 매우 긴 완사면을 오를 때 적합한데, 한 쪽 발은 삐에 아 쁠라 자세를 취하고, 다른 한 쪽 발은 프론트 포인팅 자세를 취하는 발 자세이다.
      삐에 트와지엠은 양 쪽 발을 번갈아 가며 쉴 수 있어 긴 사면을 오르는데 매우 유용한 자세가 된다. 쉴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삐에 아 쁠라를 취한 발이 아래쪽에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삐에 아 쁠라가 프론트 포인팅 보다 안정되고 편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이 발 자세는 시계의 양 바늘이 3시를 가리키는 모양새와 같다하여 쓰리 어클락 포지션(Three O'clock Position) 이라고도 한다.
      평균각도 30도의 매우 긴 경사면을 쉽게 오를 수 있다.

      ( 효율적인 보행법 )
        ◐◑빙벽 등급 체계◐◑

        우리나라는 미국식 표기법을 따르게 되는데, WI 1부터 시작하며, WI 7까지 등급을 나 며, 이 이상의 등급은 확보물 설치가 어려워(위험하여) 적용하지 않는다.
        WI는 Water Ice의 뜻이고 아라비아 숫자는 클수록 어려움을 뜻한다.

        WI 1 피켈을 이용하지 않고 아이젠으로만 오를 수 있는 평지와 같은 정도의 완경사로 추락에 위험이 전혀없다.
        WI 2 빙사면이 10 - 30도의 경사가 부분적으로 이어지며, 피켈의 스파이크를 이용하여 몸의 균형을 유지하게된다.
        WI 3 빙사면이 30 - 60도의 경사가 부분적으로 이어지며, 한 자루의 피켈만으로 피크를 얼음에 박아 몸을 당겨오르게 된다.
        WI 4 빙폭이 60 - 80도의 평균 각도가 경사가 부분적으로 이어지며, 아이젠 바닥을 딛고 쉴 수 있는 사면을간혹 만나게 되고, 두 자루의 피켈을 사용해야만 오를 수 있게 된다. 설악산 실폭 정도를 비교할 수 있으나실폭은 조금 더 등급을 올려야 적당할 것 같아 +첨자를 붙여 WI 4+ 정도면 되겠다.
        WI 5 빙폭의 평균 각도가 80 - 90도 이루고 피켈에 손목걸이를 이용해야 할 경우이며, 프론트포인팅을 계속 사용해야만 한다. 강원도 강촌에 구곡폭를 비교할 수 있으나, 구곡폭는 등급을 조금 내려야 적당할 것 같아-첨자를 붙여 WI 5- 정도면 되겠다. 토왕폭 상단이면 적당하겠다.
        WI 6 얼음 기둥이나 그 얼음 기둥이 지면에 닿지 않은 얼음 촉의 형태이다. 설악산 대승폭이면 비교할 수 있으나WI 6-면 적당하겠다.
        WI 7 수직 형태의 얼음이 얇아 피켈을 망가트릴 수 있으며, 확보물인 스크류 설치가 불확실 하다.


      보행을 할 때에는 양발의 폭을 넓히는 것보다는 좁히는 것이 체력 소모도 적고 안정된다.
      이는 한 걸음 한발에 완전한 체중이동을 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양발 폭이 좁게 되면 아이젠의 발톱에 걸려서 몸의 균형을 잃어버리는 위험함이다. 그래서사면을 내려 올 때에는 넘어지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해지기 때문에 양발의 폭을 넓혀 걷고, 반대로 오를 때에는 양발의 폭을 좁힌다.
      하지만 올라갈 때에는 아이젠에 걸려 넘어져도 대처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이런 보행 방법들은 사면을 오를 때 체력 소모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이다.
      사고는 미숙한 등반기술에서 생기는 것보다는 약해진 체력에 의해서 생기는 일이 더욱 많다.

      손 자세

      ( 평지에서 - 삐올레 깡 Piolet Canne )

      피크의 방향이 걸어가는 방향, 즉 앞으로 향하게 손으로 쥐고 지팡이를 사용하듯 스파이크를 얼음 사면에 지지하며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이 자세를 삐올레 깡이라 한다.
      평균 30도의 경사까지 몸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피켈 사용법이다. 또한 피크가 뒤로 향하게 하여 손으로 쥐기도 하나, 이런 자세는 추락할 때 제동을 빨리 하기 위한 방편의 주로 사면을 내려 올 때 취한다.

      ( 사면에서 1 - 삐올레 라마쓰 Piolet Ramasse )

      피올레 깡으로 몸을 유지 할 수 없는 경사면은, 피크 부위를 거머쥔 피올레 깡의 손 자세에서 다른 한 손으로 샤프트 잡고 스파이크를 몸 뒤 사면에 지지하여 몸의 균형을 유지하게 된다.
      이때 체중이 피켈에 많이 실리도록 해야한다.
      이 자세를 삐올레 라마쓰라고 하며, 평균 40도의 경사면을 오를 수 있다. 이때 발의 자세로는 삐에 아 쁠라가 적당하다.


      ( 사면에서 2 -삐올레 앙크르 Piolet Ancre )

      삐올레 라마쓰의 손 자세로 오를 수 없는 더 급한 경사면은 샤프트를 잡고 휘둘러 피크를 얼음에 박은 후 다른 한 손으로 피크 부위를 잡아 당겨 오르는 자세인데, 이 자세를 삐올레 앙크르라고 한다.
      평균 60도의 경사면을 오를 수 있다. 이때 발의 자세는 삐에 아 쁠라 인데, 아이젠 바닥 발톱을 사면에 잘 지지할 수 없다면 프론트 포인팅 자세를 취한다.


      ( 사면에서 3 - 삐올레 뜨락시옹 Piolet Traction )

      삐올레 앙크르처럼 피크를 얼음에 박고, 사프트만 손으로 쥐고 당겨 오르는 이 자세를 삐올레 드락시옹이라 하는데, 문제는 두 개의 피켈을 사용해야만 좀더 안정된 자세를 유지하게 된다.
      이 삐올레 뜨락시옹의 손 자세는 프론트 포인팅의 발 자세와 조화를 이루면 수직이나 역 경사 등, 고 난이도의 등반을 가능케 한다. 현대 빙벽등반 기술의 대부분을 이 등반자세 이다.

      ( 내려오기 - 삐올레 람쁘 Piolet Ramp)

      한 자루의 피켈로 사면을 내려오는 삐올레 람쁘는 사면 아래쪽에 피크를 박고 계단의 난간처럼 사프트를 잡으며 내려오는 기술이다.
      모든 등반기술의 동작을 역순으로 하면 내려오는 동작이 된다.
      하지만 쉽지 않기 때문에 이 삐올레 람쁘로 대신한다.


    아이스 햄머

    아이스바일과 그 기능이 비슷하나 보조 장비 정도의 기능을 갖는다. 아이스바일에서 스파이크가 없는 모양이다.

    아이젠

    신발 바닥에 끈(스링)이나 바인딩으로 부착시켜 단단한 설 사면이나 빙 사면에서 몸을 유지하게 하는 기능을 갖는 장비이다.
    앞 발톱 2개와 바닥 발톱 10개의 배열은 등반 형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앞 발톱이 1개인 아이젠도 사용하게 된다. 또한 조인트가 있는 힌지드 식과 조인트가 없는 리지드 식이 있는데, 이 기능을 굳이 나눈다면 힌지드 식은 보행을 많이 하는 완경사 설벽 용이고, 리지드 식은 등반을 많이 하는 급경사 빙벽용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 설사면 보행에서 아이젠 바닥으로 눈이 달라붙어 아이젠 발톱의 기능을 무색하 게 만드는 매우 위험한 스노우볼 현상을 막아주는 아이젠 눈 차단 막이 필요하다.

    아이스 앵커

    얼음에 지지 점을 만들어주는 확보물로 스크류, 스나그, 훅 등이 있으나 그 중에 스크류가 매우 안정적이다. 이밖에 얼음을 홈통 식으로 파내거나 구멍을 내어서 만든 아이스 볼라드와 V홀 등 자연적인 확보물이 있는데 주로 하강용으로 이용한다.

    스노우 앵커

    눈에 지지 점을 만들어주는 확보물로 스노우바, 데드맨 등이 있다. 스노우바는 눈에서 최적의 확보물로 V형과 T형이 있다. 이 밖에 단단한 눈이나 다진 눈을 홈통 식으로 파내어 만든 자연적인 확보물인 스노우 볼라드가 있다.

    로 프

    로프를 다른 이름으로 자일이라고도 한다. 겨울 등반용 로프는 우선 방수처리가 되어있어야 하며, 굵기와 길이는 등반 형태에 따라 선택되어진다. 암벽등반용과 같이 굵기는 10미리에서 11미리 사이, 길이는 50미터에서 60미터를 사용한다. 그러나 등반 형태에 따라 굵기 9미리에 길이 100미터의 규격을 사용하기도 한다.
    설상등반이나 빙하 등반에서도 암벽등반용 자일을 기준으로 굵기와 길이를 잘 선택하여 사용하게 된다.

      ◐◑빙벽등반 장비와 손질하기◐◑

      피 켈

      완경사용 피켈의 샤프트의 길이가 약 70-90센티미터 정도로 자신의 키에 맞는 길이를 선택한다. 즉 똑바로 서서 피켈을 손으로 잡았을 때 스파이크가 바닥 면에 닿으면 적당한 길이 이다.

      피크는 앞 부리가 양성피크와 음성피크의 두 가지 모양이 있다. 양성피크가 종합적으로 모든 등반에 적합하다 할 수 있다.
      피크의 각도는 대체로 완곡선을 이루면 된다. 급경사용 피켈의 샤프트의 길이는 약 40-60센티미터가 적당하다. 피크의 앞 부리 모양은 양성피크 형이 얼음 속으로 잘 파고들게 되어 안정감이 있다.
      또한 피크의 앞 부리 쪽인 옆면을 유선형으로 예리하게 손질해두어야 얼음에 잘 박히게 된다.

      피켈 손목걸이

      피켈에는 손목걸이가 있음으로 해서 팔 힘의 소모를 줄일 수 있고, 피켈을 떨어트리는 손실을 막을 수 있다.

      또한 손목걸이는 확보용으로 이용된다. 즉 완경사용 피켈의 손목걸이는 자신의 안전벨트에 연결하여 눈 속으로 박아 넣게된다. 급경사용 피켈의 손목걸이는 손목을 쉽게 조이고 풀 수 있게 되어 있어야만 확보물( 스크류 )을 손쉽게 설치할 수 있다.
      이점은 수직빙벽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등반 방식에 있어서 손목걸이의 사용여부는 등반경기에서 만은 매우 민감한 부분인데, 그 사용은 진정한 자유등반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자유등반의 의미는 빙벽을 포함한 전체적인 동계등반에서 중요한 점이 아니기 때문에 사용 여부에 대해서 고심할 필요는 없다.

      아 이 젠

      빙벽에서는 아이젠 발톱이 예리해야 한다. 단단한 빙벽일 수록 더욱 그렇다. 완경사 등반인 프랑스식 등반 기술에서는 열 개의 바닥 발톱이 주로 사용되고 급경사에서는 두 개의 앞 발톱이 사용된다. 그런데 아이젠은 등반보다는 이동하는 보행 중에 발톱을 많이 상하게 된다.
      물론 아이젠을 신고 보행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겠지만, 무뎌진 아이젠 발톱으로 단단한 빙사면에서 안정된 지지력을 얻으려함은 넌센스이다.

      등반은 우선 안전해야 하기 때문에 무뎌진 아이젠 발톱은 줄로 갈아서 예리하게 만들어 둔다.
      또한 두 개의 앞 발톱을 사용하는 빙벽에서는 그 모양이 수직으로 되어있는 것이 수평으로 되어있는 것보다 안정감이 있다. 왜냐하면 아이젠에 걸리는 몸의 하중이 수직으로 받기 때문이다.

      빙벽용 확보물

      스크류, 스나그, 훅이 있으나, 그 중 스크류가 가장 안정된 확보물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스크류는 자유등반에서 확보물 설치를 용이하게 해 준다.

      이 스크류는 앞에 톱니가 있어 돌리면 얼음을 깍아 내면서 파고드는데, 이 톱니가 무뎌지면 스크류는 얼음에 잘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무뎌진 톱니도 줄로 잘 손질해서 사용해야 한다. 이 확보물들은 불안정한 얼음 결빙에서는 한 개 이상을 설치해야 할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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