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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산의 역사  +   [자료실]   |  2006. 9. 13. 17:35

자료 출처ㅡ신구 대학 산악부.

    ◐◑ 등산의역사 ◐◑

등산의 역사는 도전과 극복의 역사다. 이는 험난한 대자연에 도전하면서 끊임없이 인간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해 온 과정이다. 지난200여 년 동안 등산은 빠른 속도로 발전해 왔다. 처음에는 인간의 능력으로 오르지 못했던 높은 산의 정상에 도전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차츰 미답봉이 없어지자 대자연을 대상으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도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사람의 발길이 닫지 않은 미지의 세계는 거의 없다. 그러나 높이를 추구하고 어려운 자연환경을 극복해 나가려는 인간의 욕구는 당산의 영역을 새롭게 넓혀 나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한 도전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 근대등산의여명기 ◐◑

    근대 등산 이전의 기록

근대 등산이 시작되기 이전에도 산에 오른 기록들이 발견되고 있다. 기원전 328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카블(Kabul)을 공략하기 위해 힌두쿠시(Hindu Kush) 산맥을 넘었으며, 기원전 218년 에는 카르타고의 한니발(Hannibal) 장군이 로마제국을 공격하기위해 알프스의 크라이넨 생 베르나르(Kleinen st, Bernard)를 넘은 기록이 있지만 이것은 군사적인 목적에서 산에 오른 기록이다. 등정을 목적으로 암봉에 오른 최초의 기록은 1492년 프랑스 드페네 알프스의 암봉 몽테까유(Mont Aiguille, 2,125m)등정이다.

1521년에는 스페인의 코르테스(Cortes)가 자기 병사에게 명하여 멕시코의 화산 포포카테페르(Popcateper 5,450m)를 등정케 했다. 이 등정은 정상에서 화약 제조용으로 쓸 수 있는 유황을 체취해 오는 것이 목적이었다.

1574년에는 사상 최초의 등산 기술서가 출판된다. 이 책은 취리히 대학의 요자이스 짐러(Josias Simler) 교수가 눈 덮인 알프스를 넘는 여행가들을 위해서 설상 보행 기술, 로프 등의 사용법과 크레바스와 눈사태의 위험 등을 언급한 책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수수한 등산이 그 목적으로 자리잡기 이전어ㅔ 이루어진 연속성이 없는 행위였다.

소쉬르의 제언가 몽블랑 초등

1760년 어느날 제네베의 자연과학자 소쉬르(Horace Benedict de saussure)는 프레방(2,526) 산에 올라 맞은편에 있는 몽블랑을 보고 그 장엄함에 감동한 나머지 '누구든지 이 산에 오르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겠다.' 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그는 아무도 오르지 못한 이높은 산의 신비한 정체를 밝히고 싶었다. 그 당시는 많은 사람들이 이 산을 두려워했다. 몽블랑의 몽(Mont) 은 프랑스어로 '산(Mountain)'이며 블랑(Blanc)은 '힌빛(White)' 으로 '언제나 하얀 만년설이 덮인 산' 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당대의 위대한 과학자조차 만년설로 덮인 알프스의 산 속에는 용이 살고 있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1783년과 1785년에 두 차례의 도전을 시도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기상 탓으로 모두 실패했다. 이 두번의 도전에 동참했던 사람 중에는 훗일 몽블랑의 첫등정자가 된 샤모니의 의사 미셜 가브리일 빠가르(Michel Gabriel Paccard)가 끼어 있었으며, 그는 두 번의 실패를 경험 삼아 초등정에 성공한다. 몽블랑의 첫 등정의 쾌거는 1786년 8월 8일에 이루어졌다. 미셀 빠가르와 포터로 고용된 수정 채취꾼인 자크 발마(Jacque Balmar)가 마침내 정산 등정에 성공한다. 이떄가 프랑스 혁명 3년 전으로 소쉬르가 현상금을 걸은지 26년이나 지난 뒤였다. 이로써 알프스의 산이 공포와 신앙의 대상이었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 두사람은 2,392m의 높이에서 비박을 한 후 고산병과 설맹, 동상 등의 증세에 시달리면서 등반을 감행했다. 로프나 크램폰 같은 장비도 없이 크레바스를 건너고 깊은 눈을 헤치면서, 비박지를 출발한지 15시간만에 몽블랑 정상에 오른다. 이들이 사용한 용구는 알펜 슈톡(등산용 지팡이)과 간단한 방한복, 기압계, 온도계 등의 기구와 약간의 식량이 전부였다. 이 도전은 당시 상황으로는 목숨을 건 대모험이었다. 등산이라는 말조차 없던 시대에 이들이야말로 미지의 세계를 정복한 선구자라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이 몽블랑 초등정이 소쉬르가 내건 현상금을 목적으로 올랐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등산 효시는 그 이듬해로 보아야 한다는 으견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 이듬해에는 바로 소쉬르가 20여명의 짐꾼을 고용해 직접 두 번째 몽블랑 등정을 이루어 내기 떄문이다. 소쉬르는 이떄 정상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가지고 간 계기를 사용해 몽블랑의 높이를 4,755m로 측정한다. 미셸 빠가르가 한해 전인 첫 등정때 측정한 높이는 4,738m였다 소쉬르가 측정한 실제 높이(4,807m)에 더 가깝다. 소쉬르는 진정한 의미의 등산을 시작하는 첫 계기를 마련했고. 스스로가 몽블랑 재등에 성공한 인물로 '근대 산악의 아버지' 라고 불린다

    ◐◑ 등산의 황금기 개막 ◐◑

알프스 초등정 시대

몽블랑 등정으로 이후 알프스의 여러 고봉들이 많은 개척자들의 도전을 받게 되고, 하나 둘씩 등정되기 시작하였다. 몽블랑 등정 이후, 주목을 받게 된 산은 알프스 제2의 고봉인 몬테로자 (MonteRosa)였고, 이 봉우리 중 하나인 푼타 조르다니(Punta Jordani, 4,055m)가 1801년에 초등정된다. 1811년에는 베르네의 알프스의 융프라우(Jungfrau. 4,167m) 1850년에는 동부 알프스에서 유일하게 4,000m가 넘는 피츠베르니나(Pizbernina. 4,052m)가 등정된다. 알프스의 황금기는 1854년 난공불락으로 여겨 왔던 베터호른(Wetterhorn. 3,701m)의 등정을 시작으로, 1865년 4,000m 봉우리 가운데 최후의 난봉이던 마터호른의 등정으로 일단락 된다. 이 기간에 무려 60개가 넘는 4,000m 높이의 고봉들이 모두 등정되었다. 세계 등산사에서는 이 12년의 기간을 이른 바 '알프스 등산의 황금시대' 라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1859년에서 1865년 사이에 149개의 알프스 고봉이 초등정 되었다. 순수 등산을 뜻하는 '알피니즘' 이란 이름이 탄생한 것도 바로 이 시절이다.

알프스의 황금시대는 단연 영국인들의 활약이 돋보였던 시기다. 황금시대의 시작과 끝맺음의 주역이 모두 영국인이었다. 이는 산업 혁명을 바탕으로 한 영국의 경제력과 국력의 반영이기도 했다. 알프스의 미답봉들을 선두에서 섭렵하던 영국은 1857년 12월 22일 세계 최초의 산악회인 '알파인 클럽(The Alpine Club)'을 창립한다. 이들은 산악회 명칭에 구태여 영국이라는 국명을 넣지 않았을 만큼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알파인 클럽은 1863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감인<알파인 저널 : The Alpine Journal>을 창산하여 오늘날까지 발행하고 있다. 영국 산악회에 뒤이어 1862년에는 오스트리아 산악회가(Osterreicher Alpenverein, 약칭 OVA)가, 1863년에는 스위스(Sehweizer Alpin Club, 약칭 SAC)가, 1869년에는 독일 산악회(Deutscher Alpenverein, 약칭 DAV), 1874년에는 프랑스 산악회(Clube Alpin Francais, 약칭 CAF) 등 유렵 열강들이 하나 둘씩 산악회를 창립한다. 19세기 알프스에서 수많은 초등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이들 각국 산악회들이 경쟁적으로 등반 활동을 벌인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다. 또한 황금시대는 등산 가이드들의 활약상이 두드러졌던 시기다. 영국인의 화려한 초등정 배경에는 현지 가이드들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가이드레스 등반과 단독 등반

현지 등산 가이드들의 활약은 초기에는 미진했으나, 점차 기량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알프스의 황금기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초등정들이 이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이루어 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시기에도 가이드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만으로 등반을 하는 가이드레스 등반을 시도한 사람들이 있었다. 1857년 영국의 허드슨(Hudson), 케네디(E. S. Kennedy), 에인슬러(Ainsli), 스마이스(Smyth) 형제 등이 가이드레스 등반의 첫 문을 열었다. 이들은 클라인 마터호른(Kleni Matterhorn), 브라이트호른(Breithorn), 몽블랑 등에서 가이드레스 등반을 성공시킨다. 이들의 등반은 가이드레스 등반의 효시로 기록된다. 가이드레스 등반이 성행하던 1865년부터 1차세계대전 직적인 1914년까지로 보고 있다. 당시 영국의 등산가는 전통적인 부유 계층이었기 때문에 알프스 가이드들을 쉽게 고용할 수 있었지만.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산은 대중적이고 중산 계급이 주로 즐겼기에 실력있는 가이드를 고용하기가 벅찼다. 자연스럽게 가이드레스 등반이 발달하게 되었고, 나아가 단독 등반도 불사하는 도전이 감행되기 시작한다. 당시 루드빅 푸르첼러(Ludwig Purtscheller)와 에밀 치그몬디(Emile Zigmondy), 오토 치그몬디(Otto Zigmondy) 형제는 당대를 대표할 만한 가이드레스 등반을 실천한 산악인이자 단독 등반가였다. 또한 대표적인 단독 등반가로는 오스트리아의 게오르 빈클러(Georg Winkler)를 꼽을 수 있다.

    ◐◑ 한국의 등반사 ◐◑

년 도

주 요 내 용

1929년

영국인 공사관 아처(C.H.ARCHER)는 페이시(E. R. Paccy), 일본인 야마나카(山中)와 인수봉을 등반하다. 이는 기록상 한국 최초의 암벽 등반으로, 이들은 인수봉 정상에서 이미 이 땅의 선조들이 남긴 발자취를 보았다고 말했다.

1931년

일본인 이야마와 이누마가 금강산 비로봉(1,638m)에서 처음으로 스키 등산을 하다.

한편,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중심으로(조선인이 합류) '조선산악회'가 창립되고, 회지 <조선산악>을 창간하다.

1935년

양정고보 영어교사인 황욱이 <월간 중앙> 7월 호에 기고한 ' 록크 크라이밍과 그 지식' 은 암벽 등반에 관한 우리 나라 최초의 글일 것이다. 황욱은 당시 일본의 입교(立敎)대학 산악부 출신이다.

이듬해인 1936년 국내 최초의 여성지<女性> 창간호에 이화여전 하이킹클럽과 경성체육학교 하이킹클럽이 소개되다. 한편, 1월에는 일본의 경도제대 산악부가 극지법을 사용해 백두산(2,750m)을 동계에 초등하고, <백두산 원정 보고서>를 펴냈다.

1937년

조선인으로 구성된 첫 산악회 "백령회(白嶺會)" 가 창립되어, 당시 엄흥섭,김정태,주형열 등 백령회의회원들은 활발한 등반 활동을 하였다.

또한 "양정고보 산악부" 가 학교 산악회로는 처음으로 창립하다.황욱이 초대 지도교사를 맡았다. 양정고보 산악부의 전신으로 30년대 초부터 "무레사네(물에산에)"라는 이름의 건실한 등산 모임이 있었다.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백령회의 회원이 주축이 되어 9월15일 '한국산악회'를 창립하다. 이는 사회단체로는 두 번째로 정부에 등록된단체이며, 북한산 비봉에서 광복기념 등산회를 개최하다.

1946년

한국산악회는 최우선 사업으로 국토구명 학술조사를 대대적으로 전개키로 하고,2월 한라산을 시작으로 오대산과 태백산맥, 울릉도와독도, 차령산맥 그리고 서해고도와 다도해 등 1955년까지 총 11차례에 걸쳐 전 국토의 학술조사를 실시한다.

한국산악회는 최초로 지방지부(경남지부,경북지부)를 설치한다.

한편 한국산악회는 9월 인왕산, 북한산에서 '제1차 암벽 등반(Rock Climbing)강습회'를 개최하다.

36명이 참가한 이강습회는 일반 산악인을 위한 최초의 등산교육으로 기록된다.

1949년

경희대 산악부, 서울대 산악부 등 대학산악부가 창립되기 시작하다.

1957년

경북학생연맹이 최초로 지방연맹체를 창립하다. 경북학생산악연맹은 최초로 종합 정기간행물<산악>을 발간하였다(1961년).

1962년

군사정권이 수립되면서 정부의 유사단체 통합령에 의해 대한 산악 연맹을 창립하다.

한편 우리 나라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이 이루어진다. 경희대산악부가 다울라기리2봉의 정찰 등반을 하였다.정찰활동중 무명봉(6700m)을 등정하고, 박철암 대장은<히말라야 다울라기리 산군탐사기>란 제목으로 정찰보고서를 펴냈다.

1967년

대한산악연맹 산하 조직으로 서울특별시 산악연맹을 필두로 경기도, 전북, 경북, 제주, 충북, 충남산악연맹이 차례로 가입하다.

1968년

대한산악연맹이 '국토종주3천리' 대장정을 시작하다. 최남단인 마라도에서 출발하여,1972년 향로봉에서 끝났다.

이는 산악인에 의한 최초의 백두 대간 종주로 기록되었다.

1969년

한국산악회가 해외원정등반 훈련으로 설악산에서 동계훈련을 실시하던 중 이희성 대장 등 10여명의 대원이 중음의계곡에서 눈사태로 사망하다.

한편, 최초의 산악잡지 <등산(지금의 '월간 山'의전신)>이 5월에 창간하다. 6월에 또 하나의 잡지 <산수>가 창간하였으나 불과 넉 달만에 문을닫았다.

이해에는 인수봉,선인봉에서 무려 10개의 등반 루트가 개척되었다.

중앙관상대는 국내최초로 관악산 정상에 기상 레이더를 설치하였다.

1970년

정부가 대한산악연맹의 협조를 얻어 전국 유명산에 인수산장, 권금성산장, 노고단산장 등 산장 및 대피소 35개를 건립하다.

1971년

대한산악연맹 원정대가 최초로 8,000m봉인 로체사르(8,400m)에 도전하다. 등정은 실패했으나, 최수남은 한국인 최초로 8,000m 선을 넘어선 산악인이 된다.

같은 무렵 전국합동대가 마나슬루(8,163m)에 도전한다. 김기섭이 등반 도중 추락사하므로 한국인 최초의 희말라야 조난자로 기록된다.

한국산악회에서는 최초로 8명을 프랑스 국립스키등산학교(ENSA)로 보내 40일간 교육을 받다. 이듬해에도 4명을 ENSA로 파견햐였다.

1972년

김정섭이 마나슬루에 재도전하였으나, 눈사태로 15명(대원5명,세르파10명)이 사망하다. 이 사고는 세계 희말라야 등반사에서,1937년 낭가파르밧에서의 독일팀 16명 사망에 이어 두 번째의 대형사고로 기록되었다.

1974년

한국등산학교(초대 교장 권효섭)가 상설등산학교로는 최초로 개교. 정규반, 암벽반, 동계반, 특별반으로 나누어 정기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대한산악연뱅은 에베레스트 원정 제1차 훈련을 지리산에서 실시한다.

1975년

대학산악연맹은 에베레스트에 1차 정찰대 7명을 현지로 파견하다. 이들은 정찰활동중 트레킹 피크인 아일랜드 피크(6.189m)의 주봉과 서봉을 전원 등정한다. 한국인이 히말라야 독립봉 등정은 이것이 처음이다.

구곡폭포(김재근), 설악산 형제폭(김호진 등)이 초등되어, 빙벽 등반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다.

1976년

에코 클라이밍 클럽의 유기수 등이 선인봉 남측 오버행 전 코스를 너트만을 사용하여 완등하다. 이로써 국내에서도. Clean Climbing의 열풍이 일기 시작한다.

1977년

한국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이 이루어지다. 김영도 대장이 이끄는 대한산악연맹 원정대는 한번의 실패를 딛고, 고상돈과 펨바 노르부 셰르파가 9월 15일 정상에 섰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8번째 에베레스트 등정 국가가 되었고, 고상돈은 58번째 등정자가 되었다. 박상열과 앙 푸르바 셰르파는 8,700m의 고도에서의 비박 기록을 세웠고,이 최고 높이의 비박은 한동안 꺠어지지 않았다.

한편, 국내 최대의 빙폭인 토왕성 폭포의 상하단이 4박5일만에 크로니산악회의 박영배, 송병민에 의해 초등되다.

1978년

'자연보호헌장' 이 선포되다.

한국산악회 원정대(전병구 대장 외 5명)는 안나푸르나 4봉(7,525m)을 등정하고, 유동옥은 최초의 7,000m 급 등정자가 되었다.

한편, 대한산악연맹은 중앙일보와 합동으로 북극탐험대(대장 김영도)를 조직, 최초로 북극권에 도전한다. 대방원을 가로질러 북위 80도선에 도달하였다.

1979년

최초로 북아메리카주 최고봉 매킨리(6,194m)에 3개의 한국대(한국일보, 고령산악회, 고려대산악부)가 도전하여 모두 성공하지만, 선두의 한국일보대는 고상돈, 이일교가 하산시에 추락사한다.

또한,최초로 악우회가 유럽 알프스의 아이거(3,970m) 북벽에 도전하여 성공하다.

1980년

동국산악회의 마나슬루 원정대(대장 이인정)가 등정에 성공하다. 이는 단일 산악회가 8,000m 봉을 등정한 첫 기록이다.

요세미티에서는 이영식, 허정식, 강구영의 3명이 하프돔을, 재미교포 산악인 주영이 엘캐피탄을 최초로 등정하다.

1981년

서울문리대 OB산악회가 최초로 남아메리카 최고봉 아콩카구아(6,959m)에 도전하여 등정에 송공하나, 1명이 실종되었다.

악우회가 최초로 카라코람에 진출하다. 난이도 높은 바인타브락 2봉(6,960m)에 도전하지만 1명이 추락사한다. 악우회는 2년 후인 1983년에 재도전하여 유한규, 임덕용이 세계 최등정의 위업을 이루어낸다.

1982년

최초의 여성 원정대가 히말라야로 떠난다. 선경여자산악회는 람중히말(6,986m)을 등정하고, 기형회, 윤형옥은 산국인 최초의 여성 등정자로 기록된다.

부산학생산악연맹은 지방 팀으로는 최초로 히말라야에 도전하여, 가네쉬 4방(일병 파빌봉, 7,102m)을 등정하다.

곧이어 대전쟈일클럽은 고줌바캉(7,806m)에 도전, 김영한이 세계 초등정의 대기록을 수립힌다.

한편, 남선우는 푸모리 (7,145m)를 동계에 등정하는데, 이는 우리의 첫 동계 등정이다

1983년

포항향로산악회가 최초로 인도 캐시미르에 진출하여 눈(7,135m)에 등정하다.

허영호는 마나슬루를 대상으로 최초로 8,000m 급 단독 등정에 성공하다.

중앙대, 양정 합동대는 최초로 아마다블람(6,812m)의 동계 초등정을 이루어낸다.

1985년

울산의 합동대가 히말출리 북봉(7,371m)에 도전장을 내어, 이재홍이 세계 초등정의 위업을 달성하다.

남극관측탐험대(대장 홍석하)의 허욱, 허정식, 이찬영이 최초로 남극대륙의 최고봉인 빈슨 매시프(5,642m)를 등정하다. 토왕성 빙쪽에서는 전년도 이태식이 이루어낸 단독 등반 성공에 이어, 최초의 여성완등자(조희덕)가 나왔고, 대승폭빙폭을 윤대표, 정호진이 초등하다.

1987년

한국산악회의 합동대가 에베레스트를 동계에 도전하요, 허영호와 셰르파 1명이 등정에 성공하다.

한편,광운공고 OB산악회가 고줌바캉(7,806m)를 동계 초등정하고, 고교생 최미호(당시 17세)는 최연소 등정 기록을 세웠다.

1988년

대한산악연맹의 원정대가 에베레스트와 로체(8,516m)를 동시에 등정하다. 최초의 8,000m 급 연속 등정기록이고, 총 10명의 대원이 등정자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경남산악연맹의 원정대는 난이도 높은 고산 등반을 추구하자는 일념으로 눕체 북서봉(7,745m)을 동계에 초등정하다.

울산의 합동대는 다울라기리 6봉(7,268m) 구르자히말(7,193m) 구스퉁 북봉(6,529m)을 연속등정한다.

최초의 여성대가 매킨리 등정에 성공하고, 검악산악회는 뉴질랜드의 마운트 쿸(3,754m)을 등정하다.

한편, 국내 최초의 인공암벽이 서울 사레바 지사에 설치되고, 청악산우회가 설악산 소승폭 빙폭을 초등하다.

1990년

처음 파미르의 최고봉 코뮤니즘(7,495m)을 등정하다. 이인정 대장이 이끄는 합동대의 5명이 정상에 오른다. 이어 한국산악회에서는 1명이 코뮤니즘에 등정하고, 2명이 코르제네프사카야(7,105m)의 정상에 올랐다.

한편, 전년도에 김운회, 조금석이 국사대폭을 초등한데 이어, 김용기, 이상록이 토왕성 빙폭은 하루에 세 번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1991년

충북 서원대산아고히가 최초로 동 파미르에 진출하여, 무즈타그아타(7,546m)를 등정하고, 대한산악연맹에서는 최초로 티베트에 진출하여 시샤팡마(8,046m)를 등정한다.

토왕성 빙폭엣허는 여성(남난희,이현옥)으로만 파티를 이루어 등반에 성공한다

1992년

천산 산맥의 국제 캠프에 참여한 대구경북, 광주전남, 강릉대, 대구, 전주, 수원, 개인팀 등이 칸텡그리(7,010m)에 19명이 대거 등정하고, 이어서 2명이 포베다(7,439m) 등정을 성공한다.

1993년

대한산악연맹의 여성원정대가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다. 지현옥, 최오순, 김순주는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첫 한국여성이 되었다.

히말라얀클럽의 허영호는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종주하고, 동국산악회의 박영석은 최초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기록을 세운다.

검악산악회는 최초로 남미 파타고니아의 피츠로이(3,441m)를 등정한다.

국내에서는 정승권이 토왕성 빙폭 단독 등반후 클라이밍 다운하는 기록을 세웠다.

1994년

경남산악연맹은 안나푸르나 남벽에 도전하여 박정현이 정상에 오른다. 이로써 히말라야 거벽 등반의 성공을 이루었다.

한편 토왕성 빙폭에서는 37분만에 상, 하단을 모두 완등한다.

1995년

경남산악연맹 원정대가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정에 성공하다. 조형규가 이끄는 이 팀은 김영태, 박정헌이 셰르파 2명과 함께 남서벽으로 정상에 오른다.

경기북부연맹에서 최초로 힌두쿠시로 진출하여, 최고봉인 트리치미르(7,708m)등정에 성공하나, 등정자 2명이 하산중에 실종하는 비극을 당한다.

김미선이 여성으로는 최초로 알프스의 그랑드조라스 북벽와 아이거 북벽을 오르고, 김점숙이 여성 최초로 토왕성 빙폭 단독 등반에 성공하다.

한편, 이인정이 최초로 상설 산악박물관을 개관하고, 이듬해에는 상설 산악도서관도 개관하였다.

1996년

대한산악연맹이 중국등산협회와 합동으로 충모강리(7,048m)와 룽보강리(7,095m)의 세계 초등정을 달성하다.

1997년

성대산악부는 초오유(8,201m)에 5명의 대원 전원이 등정하다. 성대산악부는 1991년에도 가셔브룸 2봉(8,035m)에 4명의 대원 전원 등정에 성공한 바 있다.

한국산악회는 가셔브롬 4봉(7,925m)의 서벽 중앙립으로 루트 초등을 기록하다.

1998년

세계적인 거벽으로 알려진 탈레이사가르(6,904m)의 최난관 구간인 상단의 불랙타워를 최승철, 김형진, 신상만이 세계 최초로 돌파하지만, 정상 설원에서 미끄러지며 추락사한다.

장애인 김홍빈이 아콩카구아와 매킨리를 등정하고, 12세의 김영식이 매킨리의 최연소 등정자가 되었다.

1999년

8,000m봉 4개를 등정한 대표적 여성 산악인 지현옥이 안나푸르나에서 하산 중 추락사하다.

한편, 손정준이 5.14급에 등극한 최초의 산악인이 된다. 손정주은 설악산 적벽을 자유 등반으로 완등하는 기록도 세운다

2000년

엄홍길이 8,000급 14봉을 모두 등정하여, 세계에서 8번째 완등자가 되었다. 1988년 에베레스트를 시작으로 12년만에 이루어낸 쾌거이다. 엄홍길은 외국의 일부 산악잡지에서 로체와 시샤팡마 등정의 의문을 제기하자, 이듬해에 곧바로 두 봉을 다시 등정하는 저력과 슬기로 이를 극복하였다.

K2에서는 3개 한국팀에서 총 14명이 등정하다.

대한산악연맹은 세계 7대륙 최고봉을 한해에 모두 등정하고, '새천년 7대륙의 정상' 이라는 등반기를 발표했다.

충북산악연맹과 울산산악연맹에서는 에베레스트와 로체를 모드 등정하다. 김환구(45세)는 국내 최고령 에베레스트 등정자가 되었다. 이로서 1977년부터 총 34명(여자 3명 포함)의 한국인이 세계 최고봉에 올랐다.

한편, 손상원과 고미영이 5.14 급 클라이머 대열에 합류한다. 고미영은 월드컵 여자부 랭킹 6위에 올라 세계적인 수준의 클라이머임을 입증하였다.

2001년

박영석이 8,000m 급 14봉을 모두 등정하여, 세계에서 9번째 완등자가 되었다. 1993년 에베레스트를 시작으로 8년만에 이루어낸 대기록이다.

◐◑ 세계의 등반사 ◐◑

년 도

주 요 내 용

1786년

샤모니의농부 자크발마(Jacques Balmar)와 의사인 미셀 가브리엘 빠가르(Michel Gabriel Paccard)가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Mont Blanc,4807m)을 초등정하다. 이들의 등반에 동기를 부여했던 제너바의 자연 과학자 오라스베네딕트 드 소르쉬(Horace Benedict de Saussure)도 그 이듬해 몽블랑에 오른다. 이 몽블랑 초등정으로부터 근대등산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1820년

에드 제임스(Ed James)와 그의동료들이 파이크스피크(Pikes Peak,4,310m)에 오르다. 록키산맥에서 이루어진 최고의고산등반으로 기록된다.

1829년

에마누엘 장군(General Emanuel)이 이끄는 러시아 과학자 원정대가 코카서스에 있는 유럽 대륙의 최고봉 엘브루즈(Elbrus, 5,642m)를 초등정한다. 지질학자인 렌즈(Lenz)와 쿠퍼(Kuppfer)는 정상을 200m 앞두고 돌아 섰지만, 체르케스크 출신의 킬라 하시로프(Killar Hashirov)가 정상 등정에 성공하였다.

1855년

제임스와 크리스토퍼 스마이드 형제(James and Christoper Smyth), 찰스 허드슨(Charles Hudson), 존 버벡(John Birbeck), 스티븐슨(E. J. Stevenson)이 가이드인 울리히 라우어너(Ulich Lauemer), 요한과 마티아스 줌타우그발트(Johana and Mattias Zumtaugwald)와 함께 몬테로자 최고봉인 두루프슈피체(Dufourspize, 4,638m)에 오르다.

1857년

세계 최초의 산악회인 알파인 클럽(The Alpine Club)이 런던에서 창립한다. 알파인 클럽은 세계 최고(最古)의 연감<The Alpine Joumal>을 1859년에 창간하여 오늘날까지 발행하고 있다. 이 연감의 첫 제호는 <Peaks Passes & Glaciers>였다. 이어서 오스트리아, 이태리, 스위스 등 유럽 국가에서 산악회가 탄생한다.

영국의 허드슨(Hudson) 등이 가이드 없이 몽블랑 등반에 성공한 첫 기록을 남겼다.

1865년

영국의 에드워드 웜퍼(Edward Whymper) 일행 7명(현지 가이드 3명 포함)이 알프스 4,000m 급의 최후 보루로 남아있던 마터호른 (4,478m)을 초등정하다. 하산 도중 4명이 추락사하여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비극적인 등반으로 기록된다. 이 등반으로 알프스의 황금 시대가 막을 내렸다.

1880년

에드워드 웜퍼가 남아메리카 안데스의 침보라소(6,272m) 에 오름으로써, 표고 4,000m 급의 알프스 등산 무대가 유럽 이외의 지역으로 뻗어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1883년

영국인 그래함(W.W.Graham) 일행이 시킴 지역의 포크트 피그(6,204m)를 등정하다. dlfhTJ 히말라야 등반 시대가 개막한다.

1893년

콘웨이(Conway)일행이 등반을 목적으로 최초로 카라코람에 원정하여, 파이오니아 피크(Pioneer Peak, 6,893m)를 등정하다.

1895년

머메리(Alfred F. Mummery)가 낭가파르밧(Nanga Parbat, 8,126m) 등반을 시도하다가 실종되다. 이는 히말라야 등반사에 있어 8,000m 급의 첫 도전이고, 또한 최초의 희생으로 기록된다.

1897년

가이드인 마티아스 주르브리겐(Matthias Zubriggen) 이 남아프리카 대륙의 최고봉인 아콩카구아(Aconcagua, 6,959m)를 단독 등반하다.

1904년

구스타프 하슬러(Gustav Hasler)와 프리츠 아마터(Fritz Amatter) 가 두 번의 비박을 감행하며 핀스테라호른(Finsteraarhorn, 4,275m)의 북벽에 오르다.이로써 알프스의 북벽 시대가 개막된다.

1906년

워크맨(Workman) 부부가 인도 눈, 쿤 산군의 피날클 피그(6,932m)를 등정하다. 이로써 히말라야에서 최초로 여성 등정자가 배출되었다.

1907년

톰 롱스태프(Tom Longstaff)가 가이드인 알렉시스와 앙리 브로세렐(Alexis and Henri Brocherel), 현지의 곳 hvhxj 카비르(Kabir)와 함께 가르왈 히말라야에 있는 트리슐(Trisul, 7,120m)에 올라, 최초의 7,000m급 등정을 기록한다.

한편, 노르웨이의 루벤손 일행은 시킴 히말라야의 카브루(7,353m)의 등반을 시도하여

7,290m 까지 도달하였다.

1909년

이탈리아의 아부르찌(Abruzzi)가 이끄는 원정대가 K2에 도전하다. 360여 명의 로칼 포터가 동원된 히말라야 최초의 대규모 원정대이다.

한편, 다른 이탈리아 팀이 카라코람의 초롤리사(7,654m)의 7,498m 까지 진출하였다. 당시로

는 인류가 도달한 최고 높이였다.

1910년

피터 앤더슨(Peter Anderson), 윌리엄 테일러(William Taylor), 찰스 맥거너걸(Charles McGonagall)이 qrndkapflzk 대륙의 최고봉 매킨리(MaKinley) 의 북봉(6,187m)에 오르다. 이들은 세칭 '탐광자(探鑛者, sourdoughs),라고 불리던 알래스카의 금 채굴업자들이었는데., 당시로서는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등반이였다.

1911년

귀도와 막스 메이어(Guido and Max Meyer)가 가이드인 안젤로(Angelo Dibona)와 함께 랄리데레반트(Lalidererwand)의 카르벤델(Karwendel) 북벽에 피톤을 박아 가며 루트를 내다. 알프스의 벽에 피톤이 사용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1913년

미국의 스터크(Hudson Stuck)와 카스턴스(Harry Karsterns)가 매킨리 주봉을(6,194m) 초등정하다.

1921년

영국 왕립지질학회의 에베레스트 위원회가 제 3의 극지로 불리는 에베레스트에 역사적인 도전의 첫걸음을 시작하다. 에베레스트(Everest, 8,848(8,850)m)는 '초로룽마(티베트)', '사가르마타(네팔)' 라는 현지 이름에도 불구하고, 1852년 영국이 세계 최고봉임을 밝혀 낸 것을 계기로 '에베레스트' 라고 명명하였다.

1924년

제3차 원정대가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하던 중 8,578m의 고도에서 후퇴하였으나, 선두에 선 말로리(G. Mallory)와 어빈(A. Irvine)이 실종되다. 이 사건은 히말라야 등반사에서 가장 미스터리 한 등반으로 꼽힌다. 현재에 이들이 과연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는가에 대해서는 어떠한 확실한 증거도 없다.

1928년

릭 마스가 이끄는 독일대 파미르 산군의 레닌 봉(Pik Lenin, 7,134m)을 초등정하다. 코뮤니즘 봉(Pik Communism, 7,495m)은 1933년에 아벨라코프(Abalakov)가 이끄는 소련대가 초등정한다.

1931년

에릭 쉽톤(Eric Shipton), 프랭크 스마이드(Frank Smythe), R.L.홀스워드(R.L. Holdsworth)와 셰르파 레와(Lewa)가 가르왈 히말라야의 카메트(Kamet 7,755m)까지 에 오르다. 당시까지 가장 높은 고도의 봉우리였다. 중요한 초등 기록에 셰르파가 포함된 첫 번째 경우기도 하다.

한편 알프스에서는 슈미드(Schmid)형제가 3대 북벽의 하나인 마터로흔 북벽을 오르다. 이대

크램폰 등 암, 빙벽용 등반 장비를 사용하였다.

1932년

국제산악연맹(UIAA)이 유렵 국가를 중심으로 프랑스 샤모니에서 창립하다. 한국에서는 한국산악회가 1969년, 대한산악연맹이 1970년에 가입하였다.

빌리 메르클(Willy Merkl)이 dlRM는 독일 · 미국 합동대가 낭가파르밧에 도전하여.전위봉

인 라키오트 피크(Rakhiot Peak, 7,074m)를 초등한다.

똑일의 벨첸바하(Willo Welzenbach)가 암벽 등반의 체계 (1∼6급)를 만들다

1935년

리카르도 카신(Ricardo Cassin)과 비로리오 라티(Vittorio Ratti)가 3일동안 50개의 피톤을 사용하면서 둘로미테의 치마 오베스트 디 라바레도(CIma Ovest Di Lavaedo) 북벽에 오르다.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도전적인 등반이었다.

1936년

미국, 영국 합동대의 노엘 오델(Noel Odell)꽈 빌 틸맨(Bill Tilman)이 난다 데비(Nanda Devi, 7,817m)에 오름으로써 인간이 오른 최고봉의 기록을 경신하다.

한편 일본은 아시아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히말라야 원정대를 인도 가르왈 지역에 파견하여,

난다코트(Nanda Kot, 6,861m)를 초등정한다.

1937년

독일대의 제 3차 낭가파르밧 원정대가 눈사태로 16명(대원 7명, 고소 포터9명)이 조난 사망하다. 히말라야 등반사에 있어 최대의 조난 사고로 기록되었다.

독일대는 제2차(1934년) 원정에서도 빌리 메르클 대장을 포함하여 10명이 조난 사망하여, 이

후 낭가파르밧은 독일인 숙명의 산이 되었다.

1938년

알프스의 3대 북벽 가운데 아이거(Eiger 3,970m) 북벽이 안드를 헤크마이어(Anderl Heckmair), 루드빅 뵈르그(Ludwing Vorg)팀과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 프리츠 카스파레크(Fritz Kaspark) 팀의 합동 등반으로 개척되고, 그랑드조라스 북벽은 리카르도 카신, 우고 티조니(U해 Tizzoni), 지노 에스포지토(GIno Esposito)의 3인조에 의해 개척되었다.

1950년

프랑스의 모리스 에르조그(Maurice Herzog)과 루이 라슈날(Louis Lachenal)이 안나푸르나(Annapuma, 8,091m)를 오르다. 이는 히말라야에서의 자이언트 급인 8,000m봉 등정 시대의 개막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심각한 동상에 걸렸다.

노르웨이 원정대는 힌두쿠시 산맥의 최고봉 트리치미르(7,706m)를 초등정한다.

한편 앨런 스택(Allen Steck)과 존 살레테(John Salathe)가 오랜 노력 끝에 요세미티의 센티

널 록(Sentinel Rock)북벽을 오르다. 4일이 걸린 이 등반에는, 마지막 500m 에서는 150개의

피톤과 9개의 익스펜션 볼트가 사용되었다. 이 등반은 요세미티 최초의 '빅 월(Big Wall) 등

반' 으로 기록된다.

1953년

두 개의 8,000m 봉이 초등정되다. 존 헌트(John Hunt)가 이끄는 영국 원정대 소속의 뉴질랜드인 에드먼드 힐러리(Edumund Hillary)와 세르파인 텐징 노르게이(Tenzing Norgay)가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Everest, 8,848m)에 오르고, 독 · 오스트리아 합동대의 헤르만 불(Hermann Buhl)이 극한적인 단독 등반으로 낭가파르밧(Nanga Parbat, 8,126m)에 오르다.

한편, 피에르(B. Pierre) 대장의 프랑스대는 인도 캐시미르의 눈 (Nun Ser, 7,135m)을 초등

정하고, 이때 정자 중에서 고강(Kogan)은 여성 최초로 7,000m 급을 등정한 기록을 갖게 된

다.

1954년

아르디토 데지오(Ardito Desio)가 이끄는 이탈리아 원정대 소속의 아킬레 콩파뇨니(Achille Compagnoni)와 리노 라세델리(Lino Lacedelli)가 세계2위의 고봉 K2(8,611m)를 초등정하다. 카라코람의 8,000m 급 첫 등정이다.

오스트리아 원정대는 초오유(Chooyu, 8,201m)를 초등정하는데, 히말라야 등반사에서 최초로

가을(포스트 몬슨 : Post Monsoon)철에 성공한 등정이다.

한편, 뤼시앙 베라르디니(Lucien Beradini), 로베르 파라고(Robert Paragot), 에드몽 드니

(Edmond Denis), 아드리앙 다고리(Adrien Dagory), 귀 풀레(Guy Poulet), 피에르 르쉬에르

(Pierre Lesueur)가 아콩카구아의 거대한 남벽을 오르다

1955년

발터 보나티(Walter Bonatti)가 2년전 마터호른 푸르겐(Furggen)의 동계 직등 성공에 이어. 5일만에 알프스의 난백민 프티 드류(Petit Dru)의 남서 필라를 단독으로 오르는 쾌거를 이룩하다.

세계 3위 봉인 캉첸중가(Kangchenjunga, 8,586m)와 5위 봉인 마칼루(Makalu, 8,463m)를 영

국과 프랑스 원정대가 각각 초등정하다

1956년

스위스 원정대가 로체(Lhotse, 8,516m)를 초등정하고, 곧이어 3일 후에 에베레스트의 제 2등을 성공함으로써, 8,000m 급에서의 연속 등정을 이룬 최초의 원정대가 되었다.

마나슬루(Manaslu, 8,163m)와 가셔브룸 2봉(Gasherburm 2 , 8,035m)을 일본과 오스트리아

의 원정대가 초등정하다.

1957년

슈무크(M. Schmuck) 대장의 오스트리아 원정대가 브로드 피크(Broad Peak, 8,047m)를 초등정하다. 대장을 포함하여 헤르만 불, 쿠르트 디임베르거(Kurt Diemberger), 빈터스텔러(F. Wintersteller) 등 4명 전원이 등정해 성공하다. 산소 없이, 고소 포터 없이 세 개의 고소 캠프만을 설치한 8,000m 급에서 이루어진 최초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이다. 이들은 BC로 하산한 후, 2명씩 조를 나눠 곧바로 주위의 7,000m급 산들의 등반에 도전한다. 헤르만 불은 이때 초콜라사의 정상 능선 부근에서 등산을 포기하고, 하산 중에 눈처마의 붕괴로 사망하다.

1958년

미국의 워렌 하딩(Warren Harding), 조지 휘트모어(George Whitemore), 웨인 메리(Watne Merry), 앨런 스텍 등이 요세 미티의 엘 캐피탄(El Capitan)에 최초로 고난도 루트인 노즈(Nose)를 개척하다. 18개월에 걸친 도전이었고, 45일만에 이루어 낸 등반이다. 675개의 피톤과 125개의 볼트가 사용되었다.

미국 등반대는 가셔브룸 1봉(일면 히든파트 8,068m)을 초등정하다.

19561년

토니 히벨러(Tony Hiebeler), 발터 알름베르거(Walter Almberger), 토니 킨스호퍼(Toni Kinshofer), 안데를 만하르트(Anderl Mannhardt)가 3월 6일부터 12일에 걸쳐 아이거 북벽을 동계 초등하다.

1962년

네팔 힘라라야의 자누(Jannu, 7,710m)가 등정됨으로써 '높지는 않지만 보다 어려운(Less lofty but highly difficult)' 봉우리를 추구하려는 히말라야 등반의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다

1964년

1960년 스위스대가 다울라기리(Dhaulagiri, 8,167m)를 초등정하였고, 마지막 남은 8,000m 급인 시샤팡마(Shishapangma, 8,046m)를 중국대가 초등정하다

1965년

발터 보나티가 마터호른 북벽을 동계에 단독. 직등으로 오르는 위업을 달성하다. 마터호른이 초등된지 꼭 100년 만의 일이다.

보나티는 코시모 자펠리(Cosimo Zapelli)와 2년 전인 1963년에 그랑드조라스의 워커 스퍼를

동계 초등한 바 있다.

1967년

스위스의 실벨 소당(Sylvain Saudan) 이 평균 경사도가 51도에 이르는 에귀 드 블레티에르(Aiguille de blaitiere)의 스펜서 끌르아르(Spencer Couloir)를 스키로 하강하다. 알프스에서 이루어지는 '극한 스키(extreme skiing)' 의 시초로 기록되었다.

1970년

크리스 보닝텅(Chris Bonington)이 이끄는 영국 원정대가 안나푸르나의 남벽을 초등하다. 이는 8,000m 급 산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거벽 등반이다. 이로써 히말라야 거벽 등반시대가 개막되었다.

곧이어 독일대는 낭가파르밧 남릉 중앙 벽인 루팔 벽을 초등하였다. 이떄 메스너(Messner)

형제는 정상에서 서벽인 디아미르로 하강하다가 동생이 추락사한다.

1973년

아드레이 자바다(Andrzej Zawada)가 이끄는 폴란드 원정대가 동계에 힌두쿠시의 노사크(Noshaq, 7,492m)를 등정, 희말라야 등반사에 있어 최초의 동계등정을 기록했다.

1975년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 와 페터 하벨러(Peter Habeler)가 일명 히든 피크(Hidden Peak)라고 불리는 가셔브 룸 1봉(Gasherbrum 1, 8,068m)의 새로운 루트를 순수한 '알파인 스타일'로 올라 히말라야 등반의 새 시대를 열었다.

일본 여성대가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고, 다베이준꼬는 최초의 에베레스트 여성 등정자

가 되었다. 또한 보닝턴이 이끄는 영국대는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초등한다.

1978년

라인홀트 메스너와 페터 하벨러가 최초로 산소 없이 에베레스트에 오르다. 메스너는 3개월 뒤에 낭가파르밧을 단독 등반 함으로, 최초의 8,000m 무산소, 단독, 연속 등정의 기록을 세웠다.

1980년

안드레이 자바다가 이끄는 폴란드 원정대가 에베레스트 동계에 등정하다. 이는 8,000m 급 최초의 동계 등반이다. 메스너는 북동릉을 통하여 산소 없이 에베레스트를 단독으로 등정하다.

1983년

세계 도처에서 새로운 자유 등반의 바람이 불다. 스위스의 마르코 페드리니(Marco Pedrini)는 드류의 수퍼다이렉트(Superdirect)를, 프랑스의 에릭 에스카피에는 푸(Fou)의 남벽을 자유 등반하다.

1984년

메스너와 카머란더(Hans Kammerlander)는 8,000m 봉인 가셔브룸 1,2 봉을 미리 중간 데포(Depot) 나 B.C를 경유하지 않은 채 연속 등반으로 성공한다

1985년

미국인 딕 베스(Dick Bass)는 세계최초로 7대륙의 최고봉을 모두 등정하다. 오스트레일리아 최고의 대륙의 최고봉 코시어스로(Kosciusszko, 2,228m)를 오세아니아 대륙의 최고봉인 칼스텐츠(Carstenz, 4,884m)로 변경할 경우에는 1986년에 카나다의 펫 모로우(Pat Morrow)가 최초로 기록된다.

1986년

라인홀트 메스너가 로체를 오름으로써 인류 최초로 8,000m 급 14봉을 완등한다. 1970년 낭가파르밧을 시작으로 16년만에 이루어 낸 대기록이다.

소련 원정대는 파미르의 코뮤니즘 붕과 코르즈네프스카야 봉을 동계에 초등정하다.

한편 K2에서는 13명이 산악인이 사망하는 비운이 있었으나, 최초의 부부 등정자가 배출되

고, 프랑스의 버느와 샤무는 24시간만에 K2를 오르는 기록을 수립힌다.

1987년

폴란드의 예진 쿠쿠츠카(Jerzy Kukuczka)가 시샤팡마를 끝으로 사상 두 번째로 8,000m 14봉을 완등하다. 1979년 로체를 시작으로 8년만에 이루어졌다.

1988년

일본, 중국, 네팔 합동대가 에베레스트를 남북 교차 종주하며, 사상 최초로 최고봉 정상에서 TV생중계를 성공하다. 역대 최대 규모의 에베레스트 원정대다.

에베레스트에서는 이밖에 여려 기록이 나왔는데, 프랑스의 부와벵은 정상에서 낙하산으로

활공 하강하고, 바타르는 22시간 30분 만에 무산소 등정을 성공한다. 또 4명의 체코슬로바키

아 원정대는 남서벽을 알파인 스타일로 모두 등정하지만, 하산 중에 전원 사망하였다.

1991년

항가리의 데카니(Peter Dekany)와 오스베스(Attila Ozsvath)가 가르왈 히말라야의 난봉 탈레이사가르(ThalaySagar, 6,904m) 북벽을 오르다

1992년

여성으로서는 사상 처음 8,000m 급 8개 봉을 등정한 폴란드의 반다 루트키에비츠(Wanda Rutkiewicz)가 9번쨰 봉인 캉첸중가를 등반 중 실종되다.

1993년

에베레스트 초등정 40주년의 해로 27개국에서 129명이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고, 5월 10일 하루에만 40명일 오르는 진기록을 세우다.

미국의 여성 클라이버 린 힐(Lyn Hill)이 엘 캐피탄의 노즈를 자유 등반으로 오르다. 세계

최강의 남성 클라이머들도 해내지 못한 일이였다.

1994년

노르웨이의 얼링 카케가 에베레스트를 등정함으로써, 남극 , 북극과 함께 3극점에 도달한 최초의 인간이 되다.

아시안 산악인들의 오랜 소망이던 아시아산악연맹(UAAA)이 창립하여, 창립 총회를 서울에

서 개최하다.

1995년

영국의 앨리슨 하그리브스(Alison Hargreaves)가 여성 최초로 산소 없이 에베레스트에 오르다(그녀는 이어서 K2도 연속 등정하지만, 하산 중에 실종되었다.)

스위스의 에라르 로레탕(Erhard Loretan)은 세 번째 8,000m 봉 완등자가 된다. 프랑스의 버

느와 샤누는 마칼루를 올라 8,000m 봉 13개봉을 등정하였으나, 마지막 봉인 캉첸중가에서

등반 중에 실종되었다.

슬로베니아의 2인조 등반대가 안나푸르나 정상에서 스키 활강에 성공하다.

1996년

멕시코의 카를로스 카르솔리오(Carlos Carsolio)와 폴란드의 크리스토프 비엘리츠키(Kyzysztof Wielicki)가 8,000m 봉 완등자 대열에 합류하고, 앙 리타 셰르파는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10회 등정하는 기록을 수립힌다.

미국의 맹인인 에릭 바이헨마이어가 정상인 산악인 3명과 함RP 2박 3일만에 요세미티의 엘

캡 노즈를 완등하다.

북극권 그린랜드 섬의 피요르다 지역이 거벽 등반의 새로운 대상지로 부각되다.

2000년

밀러니엄의 해를 맞이하여, 에베레스트에서는 봄에만 무려 130명의 등정자가 배출된다. 바부 치리(Babu Chiri) 셰르파는 에베레스트를 16시간 56분만에 단독 등정에 성공하여 최단 시간 등정을 갱신하다. 바부 치리는 전년도에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무산소로 21시간 30분을 체류한 진기록을 수립했다.

슬로베니아의 다보 카르니카는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BC까지 단 한번의 스키 탈부착과 휴식

도 없이 완벽한 스키 활강을 시도하여 성공하다. 2년 전인 1998년에는 한스 카멀란더가 티

벳 쪽으로 스키 활강을 성공한바 있다.

한편, 이태리의 세르지오 마르티니(Sergio Martini)는 스페인의 화니또 오이아르지발(Juanito

Oiarzabal)에 이어 7번째로 8,000m 봉 완등자가 된다.

독일의 토마스와 알렉스 후버 형제는 비아포의 바인타브락(7,285m)에 신 루트를 개척하고,

이어 가르왈의 시블링에서도 새 루트를 개척하는 등 난이도 높은 거벽 등반의 새 장을 열어

나가고 있다.

2001년

에베레스트에서는 맹인 바이헨마이어, 장애자 핀딕 텅크가 등정에 성공하고, 64세의 고령인 셔만 불이 아들과 함께 최초의 부자 동시 등정을 기록한다. 마르코 시후레디는 정상에서 스노보더로 활강한 최초의 산악인이 되었다.

엘캡의 코라존, 뮤어월 등 전세계에서 자유 등반인 활발히 전개되다.

2002년

UN 이 지구 환경보전 차원에서 정한 '세계 산의 해'를 맞이하여, 전 세계의 산악지대에서 산악인들이 산악 환경 정화와 보전 캠페인에 앞장서다

    ◐◑ 8000M 급 초 등정사 ◐◑

    ◐ 세계의 초등정사 ◑

NO

산이름

높이(M)

초등정국가

초등년도

1

에베레스트

8848

(8850)

영국

1953

2

K2

8611

이태리

1954

3

캉첸충가

8586

영국

1955

4

로 체

8516

스위스

1956

5

마칼루

8463

프랑스

1955

6

초오유

8021

오스트리아

1954

7

다울라기리Ⅰ

8167

스위스

1960

8

마나슬루

8163

일본

1956

9

낭가파르밧

8126

독일

1953

10

안나프르나Ⅰ

8091

프랑스

1950

11

가셔브롬Ⅰ

8068

미국

1958

12

브로드피크

8047

오스트리아

1957

13

시샤팡마

8046

중국

1954

14

가셔브롬Ⅱ

8035

오스트리아

1956

    ◐ 한국의 초등정사 ◑

NO

산이름

높이(M)

한국의초등정

초등 년도

대장

등정자

1

에베레스트

8848

(8850)

대한산악연맹

1977

김영도

고상돈,셰르파1명

2

K2

8611

대한산악연맹

1986

김병준

장봉완,김창선,장병호

3

캉첸충가

8586

동국산악회

1999

박영석

박영석,셰르파2명

4

로 체

8516

대한산악연맹

1988

최창민

정호진,임형칠,박쾌돈, 박희동

5

마칼루

8463

한국산악회

1982

함탁영

허영호,셰르파2명

6

초오유

8021

울산합동대

1992

김관준

남선우,김영태,셰르파2명

7

다울라기리Ⅰ

8167

부산합동대

1988

조정술

최태식,셰르파2명

8

마나슬루

8163

동국산악회

1980

이인정

서동완,셰르파2명

9

낭가파르밧

8126

경남산악연맹

1992

조형규

박희택,송재득

광주우암산악회

박찬기

김주현

10

안나프르나Ⅰ

8091

경남산악연맹

1994

박주환

박정헌,셰르파4명

11

가셔브롬Ⅰ

8068

대전,충남산악연맹

1990

윤건중

박혁상

12

브로드피크

8047

한국/스페인

1995

엄홍길,스페인4명

광주,전남산악연맹

위계룡

박신영,이정현

박현재(하산중추락사)

13

시샤팡마

8046

대한산악연맹

1991

김명수

김창선,김재수

14

가셔브롬Ⅱ

8035

성대산악회

1991

한상국

한상국,김창선

김수홍,유석재

울산시산악연맹

송정두

이용순,한영준,장상기

조재철,박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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